흥부전 읽어 내기
놀부네 갔던 흥부가 몽둥이로 실컷 맞고 돌아오니. 그것을 본 흥부 마누라, 바깥으로 뛰어나가선 덜컥 주저앉으며 태산같이 쌓인 곡식 누구를 주자고 아껴서 이리 몹씨 때렸을까. 어떤 사람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선영(先塋:죽은 조상) 제사 모신다고 호위호식 잘 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
흥부 마누라의 넋두리 중 밑줄 친 부분이 흥부와 놀부가 한 형제이면서도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가 나는 기본적인 원인이다. 바로 놀부는 장손으로서 선영의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호위호식하고 잘 산다는 것이다. 아들과 딸 중에 당연히 아들이 우선이요, 아들 중에서도 장자가 그 집안의 종손으로 조상의 제사를 모시므로 최대한 대접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와 이에 따르는 재산상속상의 차별. 이것이 흥부전을 풀어가는 주요한 열쇠가 된다.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전기까지 재산상속에서도 장남, 차남은 물론이고, 딸까지 차별되지 않았다. 사위가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재산상속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조선전기인 15세기에 완비된 법전 『경국대전』의 재산분배와 상속과 관련한 규정에도 재산상속 때 본처의 소생인 경우 장남에서 혼인한 딸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이 분급(分級)하도록 하고 있으며, 다만 집안의 가계를 잇는 사람에게만 1/5을 더 주도록 명시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나눠주며 작성한 고문서인 「분재기(分財記)」에도 조선전기에는 아들, 딸 구별 없이 똑같이 재산을 분배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흥부와 놀부처럼 출생에서부터 이미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후 주자성리학 이념이 강하게 정착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큰 전란을 겪게 되면서 혈연공동체 의식이 보다 강화되었고, 남자 중심, 장자 중심의 가족제도가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제도의 변화는 상속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17세기에 작성된 분재기에 딸의 상속재산은 아들의 1/3로 줄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봉양과 제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 흥부의 아내가 넋두리로 말한 조상 제사가 재산 상속의 주요한 기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족보에서도 아들들이 먼저 기재되었고 딸에 대해서는 사위의 이름만 기재함으로써 그 밑에 기재된 외손들의 이름은 족보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아버지 중심의 혈통만이 강조되었고, 그 중에서도 장자는 대가족 구성원의 대표자로서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놀부는 바로 이러한 조선후기 가족제도의 변화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탄생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잘사는 형과 못사는 동생들이 다수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상을 풍자와 해학을 담아 이야기로 전하는 과정에서 형의 욕심과 동생의 순박함을 과장되게 대비시킨 것이 『흥부전』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흥부가 가난한 농민의 대표라면 놀부는 이러한 사회변동 속에서 급부상한 신흥 부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흥부전』은 부자 놀부, 가난뱅이 흥부를 대비시켜 조선후기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빈부의 차이를 묘사하고 있다.
(이 글은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님이 다산연구소를 통해 보내주신 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임)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9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