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들

인연,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핑계

허심만통 2014. 12. 19. 09:06

 

 

[인연,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핑계]

 

언제든 떠날 수 있기 위해 깊은 인연을 만들지 않습니다.

깊지 않은 그 만큼 외로움이 자리 잡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떠나고자 마음 먹은 사람이 감내해야 할

몫이요 순리입니다.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사람은 홀로 선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서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채워줄 수는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간직한 사람

깊은 인연을 만들지 못해 떠난다고 너와 나를 모두 속이는 사람

 

가벼운 인연이 가벼운 만남을 준비합니다.

가벼운 만남을 위해 두꺼운 가면을 준비합니다.

가면을 쓰고도 열정은 늘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가면에 숨은 열정은 스스로조차 속이며

외로움도 아쉬움으로 포장하고 살 수 있습니다.

아쉬움은 이름 없는 꽃을 반깁니다.

이름을 알고서 생기는 집착보다 이름 모를 아쉬움이 가볍습니다.

 

깊은 인연으로 잊혀지는 사람의 그림자는

죽음의 강가에 이를 만큼 길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림자에 무게를 싣지 않습니다.

무거운 그림자는 어둠 속에 숨기기도 힘이 듭니다.

숨기기 힘든 그림자는 매일 조금씩 조금씩

살점을 도려낼 수 밖에 없기에 차리리 빛으로 숨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모든 이유 중에

가장 생생히 살아 있는 단 한가지

사람이 사람과 멀어지는 모든 이유 중에

가슴에 가장 커다란 멍을 남기는 단 한가지

그것은 바로 시퍼렇게 살아 있는 외로움입니다.

시계가 멈춘다고 시간이 멈추지 않듯

만나고 사랑하는 순간에도 외로움은 멈추지 않습니다.

외로움은 인연을 만드는 실이 아니라 인연을 자르는 칼입니다.

뱀처럼 허물을 벗는 언제나 날카로운 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만남은 심장이 없는 가슴을 만나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헤어짐은 껍데기만 남은 심장을 얻는 것입니다.

순수한 심장일 수록 공허한 가슴이 두렵고

뜨거운 심장일 수록 딱딱한 껍질을 얻게 됩니다.

외로움의 칼날은 이런 두려움 앞에 더욱 날카롭습니다.

세상에 단 둘이 만 간직한 추억일지라도

외로움은 그리움을 고통이 되게 하고

고통 위로 눈물을 흐르게 하며  

눈물 위로 슬픔이 날리게 하고

슬픔 위로 순서 없는 건조한 추억을 만들게 합니다.

 

외로움이 길든 사람은

언제든 떠날 수 있기 위해 깊은 인연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를 길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 태어나며 떠나기 위해 살아갑니다.

살아간다는 건 만나고 만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또한 헤어지고 헤어지기 위한, 잊고 잊혀지기 위한

혼자만의 처절한 춤사위입니다.

잊혀진다는 건 단 한 번도 완벽한 순간을 가지지 못한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입니다.  

흠 없는 삶이 없듯이 흠 없는 죽음도 없습니다.

하지만 잊혀진다는 건 흠 없는 완벽입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삶이란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 조차 잊고 사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건 언제나 무엇이든 남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막을 스치는 바람은 흔적을 남기고

마음을 스치는 바람은 상처를 남기고

허공을 스치는 바람은 자유를 남깁니다.

무엇을 남기든 떠날 때는 바람처럼 떠나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가슴에 가두기 어렵습니다.

가둘 수 없는 바람이라야 마음에 자유를 남깁니다.

오직 자유만이 떠난 이름을 불러 미소를 뿌려주고

오직 자유만이 잊혀진 이름을 행복의 성에 가둘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 만남과 사랑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외롭기에 만남과 사랑을 가져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기 전에 비가 먼저 내린다고 하늘이 우는 것은 아닙니다.

인연이란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