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방배동 백석대 교육동 405호실에서 만난 테너 박인수(72) 백석대 석좌교수는 목감기로 몹시 지쳐 있었지만 후배, 제자들과 송년음악회 준비로 쉴 틈이 없이 스케줄이 바빴다. 한쪽 벽에 10여개의 방청석 의자와 피아노가 놓인 박 교수의 레슨실은 대여섯명의 남녀 제자들이 ‘춘향가’ 등 전통민요를 서양 창법으로 접목시키는 고된 훈련장이었다. 제자가 ‘한오백년’과 ‘심청가’를 서양 창법으로 소화하자 “오페라 아리아와 같아, 민요 느낌이 안 난다”고 박 교수가 꼬집었다. “톤이 잘 나가다가 위쪽으로 간다. 서양 창법 쪽으로 뜨고 맥도 끊어져 자네도 노래부르며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며 날카롭게 지적을 한다. 목이 쉰 박 교수가 시범을 보이며 “차이점이 뭔지 잘 살펴라”고 주문한다. ‘순수와 대중음악의 벽을 허물며 진정한 화합의 소리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음악계의 평가를 듣고 있는 ‘한국의 도밍고’ 박 교수는 성악가로서는 전성기를 넘긴 나이임에도 후학 양성과 콘서트 준비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향수’ 음반이 만들어지게 된 사연부터 시작됐다.
“‘향수’로 잃은 것도,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1990년 향수를 부르기 전 가수 이동원씨와는 일면식도 없었지요. 방송 보고 “좋은 가수구나” 생각하는 정도였지요. 이동원씨와의 만남은 학창시절 재즈하던 동료 김준의 소개로 이뤄졌어요. 솔직히 당시 정지용 시인이 해금된 줄도 몰랐습니다. 이동원씨가 시집을 갖고 와서 ‘향수’를 읽었는데 시가 너무 좋아 금방 와닿았어요. 작곡가 김희갑씨가 수개월 걸려 작곡을 했는데 곡이 너무 좋았어요.”
박 교수는 “시가 좋고 곡이 좋고 함께할 가수가 좋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뒷일 생각 않고 바로 ‘녹음합시다’라고 승낙했다”고 회상했다.
대중가수와 처음으로 음반을 낸 일로 그는 성악계의 비난과 질타 등 혹독한 시련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몸담고 있던 국립 오페라단에서 ‘성악을 모독했다, 성악가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저를 비난했지요. 성악가라면 누구나 탐내는 국립오페라단을 제발로 걸어나와야 했습니다. 대중가수와 노래를 한 것이 클래식음악에 대한 모독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조금의 후회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모독이 되는가요. 그건 일종의 클래식하는 사람들의 권위의식에 불과했습니다.”
―‘향수’ 논쟁을 통해 느낀 것은. ‘향수’가 우리 음악계에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열린음악회’에 출연하는 성악가 후배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갖습니다. 더불어 편견과 선입견의 높은 벽을 스스로 부숴가는 즐거운 광경을 목도했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음악의 본질과 가치, 즉 음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100% 듣는 사람 위주로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흥이나 즐거움, 감동을 받는 음악이 돼야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음악이어야지, 음악가나 음악을 아는 소수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들의 착각일 뿐, 노래는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아무리 낮고 질퍽한 곳이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무대입니다.”
―한 음악평론가가 클래식의 경계와 한계를 벗어난 최초의 성악가로 교수님을 평가했습니다. 대중적 스타가 됐을 때의 느낌은.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대중가수 등 스타에게 인사하거나 아는 체를 잘 하지 않는 법인데, 제가 자주 가던 대중목욕탕에서 그들이 저를 알아보곤 ‘너무 잘했다’고 격려를 했습니다. 공항에 가서도, 그들은 ‘저를 비판하던 기성 성악가들이 우습다’며 핏대를 세워 저를 격려했지요. 당시 서울대 법대와 상대 동료 교수들도 ‘향수’ 테이프를 돌려가며 듣는 등 저를 응원했습니다. 덕분에 1990년대 들어 ‘향수’는 밀리언셀러가 됐고, 출시 20년 이후 130만장, 지금은 아마 150만장은 넘었을 것입니다.”
박 교수는 “그동안 가수 이문세씨와 ‘겨울의 미소’ 등 2곡, 안치환씨와는 통일노래 ‘우린 만나야 한다’, 가수 이수영씨와 사랑의 테마 방송 주제가를 함께 녹음해 반응이 좋다”면서 “지금도 드라마 주제가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가수 인순이씨 등을 섭외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의 젊은 날의 초상은, 방황과 좌절로 점철됐다. 20대 후반 시절로 되돌아갔다.
“1967년 대학 졸업하고 군대 제대한 후 결혼했는데, 20대 후반 제 음악인생은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졸업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국립오페라단 공연 주역을 맡게 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박 교수의 젊은 시절과 가난한 음악도의 암울한 시절, 좌절과 방황의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국립오페라단에서 극적인 성격의 오페라인 ‘마탄의 사수’ 주인공으로 발탁됐는데, 너무 잘하려고 욕심을 내는 바람에 대실패를 했습니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 오페라 평이 실렸는데 하나같이 ‘기대 이하의 졸작으로 완전 실패했다’는 혹평이 저를 좌절시켰어요. ‘무대에 세워서는 안 될 사람에게 주역을 주었다’는 혹평은 제게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그에게 아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 플루트 주자였던 아내의 월급에 목을 매야 한다는 현실에 그의 자존심이 상했고, 방황이 이어졌다.
당시 전 재산을 투자한 간장 대리점이 두 달 만에 파산했다. 다시 빚을 내 시장통에 음식점을 차렸지만 오로지 음악만을 최고의 선으로 알고 지내온 가난한 예술가의 손으로 만든 음식 맛에 반한 사람은 없었다. 돼지며 양송이도 길러봤지만 도무지 사업과는 인연이 없었다. 마지막 오기로 시작한 것이 포장마차였다.
“이것저것 하는 일마다 다 실패하고 빚질 데도 없어 망연자실할 때였습니다. 1968년 9월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 걷고 있는데 당시 무역회사 과장이던 중·고등학교 동기를 만났어요. 중·고교 때 함께 통학하던 친구로 이후 성격이 달라 결혼식에 초대도 않을 정도로 관계를 끊고 지냈지요. 함께 저녁 먹으면서 ‘솔직히 오페라 실패하고 할 게 없어 이것저것 다하다가 망해서 이러고 지낸다’고 털어놨더니 ‘사업 밑천 없어 그러느냐. 뭐하고 싶냐’며 묻기에 ‘리어카 하나 살 돈 있으면 포장마차 하고 싶다’고 했지요. 당시 친구가 ‘동업’하자며 리어카 값 2만원을 줘 시작한 곳이 신촌 뒷골목이었어요.”
박 교수는 40여년 전 리어카로 방황하던 젊은 시절 일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405호실의 제자와 성악가 지망생들이 눈이 동그래지며 박 교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6개월간의 포장마차 시절, 연탄불 살리랴, 오뎅 국물 데우랴, 순경들 눈 피하랴, 참 고달프고 분주한 초보 장사꾼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사가 끝나면 습관처럼 동생과 소주를 마셔야 했다. 주량은 소주 3~4병, 판 것보다 동생과 마신 술이 더 많았다. 취기 때문인지 콧노래가 새어나왔다. 동생의 놀란 눈을 보며 손으로 입을 막곤 했다. 가슴은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참담했다. 처가에서는 남의 귀한 딸 데려다 이 무슨 고생이냐며 성화가 대단했다.
“깨끗하게 실패를 인정해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업을 낭만으로 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제 성격이 무엇이든 즉흥적이라 결정 역시 빨랐어요. 더 이상 미련도 없었고, 마지막 밤, 동생과 함께 눈물 섞인 소주를 마시며 죽음을 생각했어요.”
모든 것이 암담했고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남지 않았을 때 ‘너를 살릴 것은 음악밖에 없다’며 리어카를 장만해 준 그 친구가 다시 찾아왔다. “돈을 댈 테니 넌 노래만 해라.” 친구의 권유는 끈질겼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끝에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황금기는 음악 속에서 있을 때였고 좌절과 방황, 굶주림과 번뇌 역시 행복으로 여겼지 않느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친구의 도움으로 하루 일곱시간의 재기공연을 준비하는 강행군이 시작됐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어떤 희생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로 매달렸다. 마침내 공연 첫날, 객석은 좌석 하나 남김없이 꽉 찼고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눈물을 삼키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언론에서 이번에는 상찬이 쏟아졌다. 긴 방황과 좌절 끝에 얻은 성공의 눈물은 감미로웠다. 자신이 선택한 음악인생에 회의를 갖게 한 언론의 가혹한 매질이 그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었고 죽음보다 더한 나락에 떨어지는 밑바닥 인생을 체험한 끝에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강철은 뜨거운 용광로의 혹독함 속에서 단련되듯이 젊은 날의 혹독했던 방황과 좌절은 새 도전 앞에 저를 더욱 강하게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습니다.”
미국 유학시절은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적이었지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미국과 캐나다, 남미 순회공연에서 오페라 주인공을 맡으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주역을 자주 맡게 되면서 그의 고질병이 또다시 도져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재채기만 해도 성대가 터져 목소리가 잠기는 제 고질병이 재발했습니다. 발성법이 나빴기 때문이죠. 잦은 공연으로 성대를 혹사하게 되면 모세혈관이 터져 2주 동안이나 노래를 못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출연 기회를 놓칠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서 훈련을 했고 기존의 발성법을 고쳤습니다.”
이때부터 그가 각종 문헌을 뒤져가며 훈련하고 연마한 발성법이 ‘벨칸토(bel canto) 창법’이다. 박 교수를 위기 때마다 구해준 것이 벨칸토 창법인 것이다.
“50대 후반에 들어서면 대부분 나이 탓에 성악가로서 위기가 옵니다. 고음이 못 올라가자 ‘목소리가 갔다’는 얘기가 들렸어요. 그래서 옛날 하던 발성법과 똑같은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문득 벨칸토시대 문헌이 생각났어요. ‘벨칸토시대 가수는 한번 마스터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청년의 젊은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전설의 발성법이라는 문구가 떠올랐어요. 그때부터 유럽과 미국을 찾아가 도서관을 뒤져서 문헌을 연구하고 또다시 연마한 끝에 ‘목소리가 살아났다’는 소리를 듣게 됐지요.”
이후 제자들과 결성한 ‘박인수와 음악친구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한국 성악의 세계화다. 그가 개발한 민요와 판소리를 서양 창법의 발성법과 접목하는 작업으로 30년째 이어지며 국내외 호응을 얻어 결실을 보고 있다. 이미 1980년대에 시작해 1997년부터 본격화한 한국 성악의 세계화 작업에 적극 동참하는 후배들이 늘기를 그는 기대하고 있다.
“민요 판소리를 세계화하는 일입니다. 서양 발성법을 안 바꾸면서 한국 민요 오페라를 통한 공연이 런던 파리 밀라노 등 유럽순회로 이루어지고 있고 미국은 해마다 하고 있는데 외국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것을 알리는 작업인데,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좋아합니다.”
인터뷰 = 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향수’ 음반이 만들어지게 된 사연부터 시작됐다.
“‘향수’로 잃은 것도,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1990년 향수를 부르기 전 가수 이동원씨와는 일면식도 없었지요. 방송 보고 “좋은 가수구나” 생각하는 정도였지요. 이동원씨와의 만남은 학창시절 재즈하던 동료 김준의 소개로 이뤄졌어요. 솔직히 당시 정지용 시인이 해금된 줄도 몰랐습니다. 이동원씨가 시집을 갖고 와서 ‘향수’를 읽었는데 시가 너무 좋아 금방 와닿았어요. 작곡가 김희갑씨가 수개월 걸려 작곡을 했는데 곡이 너무 좋았어요.”
박 교수는 “시가 좋고 곡이 좋고 함께할 가수가 좋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뒷일 생각 않고 바로 ‘녹음합시다’라고 승낙했다”고 회상했다.
대중가수와 처음으로 음반을 낸 일로 그는 성악계의 비난과 질타 등 혹독한 시련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몸담고 있던 국립 오페라단에서 ‘성악을 모독했다, 성악가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저를 비난했지요. 성악가라면 누구나 탐내는 국립오페라단을 제발로 걸어나와야 했습니다. 대중가수와 노래를 한 것이 클래식음악에 대한 모독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조금의 후회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모독이 되는가요. 그건 일종의 클래식하는 사람들의 권위의식에 불과했습니다.”
―‘향수’ 논쟁을 통해 느낀 것은. ‘향수’가 우리 음악계에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열린음악회’에 출연하는 성악가 후배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갖습니다. 더불어 편견과 선입견의 높은 벽을 스스로 부숴가는 즐거운 광경을 목도했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음악의 본질과 가치, 즉 음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100% 듣는 사람 위주로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흥이나 즐거움, 감동을 받는 음악이 돼야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음악이어야지, 음악가나 음악을 아는 소수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들의 착각일 뿐, 노래는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아무리 낮고 질퍽한 곳이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나의 무대입니다.”
―한 음악평론가가 클래식의 경계와 한계를 벗어난 최초의 성악가로 교수님을 평가했습니다. 대중적 스타가 됐을 때의 느낌은.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대중가수 등 스타에게 인사하거나 아는 체를 잘 하지 않는 법인데, 제가 자주 가던 대중목욕탕에서 그들이 저를 알아보곤 ‘너무 잘했다’고 격려를 했습니다. 공항에 가서도, 그들은 ‘저를 비판하던 기성 성악가들이 우습다’며 핏대를 세워 저를 격려했지요. 당시 서울대 법대와 상대 동료 교수들도 ‘향수’ 테이프를 돌려가며 듣는 등 저를 응원했습니다. 덕분에 1990년대 들어 ‘향수’는 밀리언셀러가 됐고, 출시 20년 이후 130만장, 지금은 아마 150만장은 넘었을 것입니다.”
박 교수는 “그동안 가수 이문세씨와 ‘겨울의 미소’ 등 2곡, 안치환씨와는 통일노래 ‘우린 만나야 한다’, 가수 이수영씨와 사랑의 테마 방송 주제가를 함께 녹음해 반응이 좋다”면서 “지금도 드라마 주제가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가수 인순이씨 등을 섭외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의 젊은 날의 초상은, 방황과 좌절로 점철됐다. 20대 후반 시절로 되돌아갔다.
“1967년 대학 졸업하고 군대 제대한 후 결혼했는데, 20대 후반 제 음악인생은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졸업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국립오페라단 공연 주역을 맡게 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박 교수의 젊은 시절과 가난한 음악도의 암울한 시절, 좌절과 방황의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국립오페라단에서 극적인 성격의 오페라인 ‘마탄의 사수’ 주인공으로 발탁됐는데, 너무 잘하려고 욕심을 내는 바람에 대실패를 했습니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 오페라 평이 실렸는데 하나같이 ‘기대 이하의 졸작으로 완전 실패했다’는 혹평이 저를 좌절시켰어요. ‘무대에 세워서는 안 될 사람에게 주역을 주었다’는 혹평은 제게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그에게 아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 플루트 주자였던 아내의 월급에 목을 매야 한다는 현실에 그의 자존심이 상했고, 방황이 이어졌다.
당시 전 재산을 투자한 간장 대리점이 두 달 만에 파산했다. 다시 빚을 내 시장통에 음식점을 차렸지만 오로지 음악만을 최고의 선으로 알고 지내온 가난한 예술가의 손으로 만든 음식 맛에 반한 사람은 없었다. 돼지며 양송이도 길러봤지만 도무지 사업과는 인연이 없었다. 마지막 오기로 시작한 것이 포장마차였다.
“이것저것 하는 일마다 다 실패하고 빚질 데도 없어 망연자실할 때였습니다. 1968년 9월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 걷고 있는데 당시 무역회사 과장이던 중·고등학교 동기를 만났어요. 중·고교 때 함께 통학하던 친구로 이후 성격이 달라 결혼식에 초대도 않을 정도로 관계를 끊고 지냈지요. 함께 저녁 먹으면서 ‘솔직히 오페라 실패하고 할 게 없어 이것저것 다하다가 망해서 이러고 지낸다’고 털어놨더니 ‘사업 밑천 없어 그러느냐. 뭐하고 싶냐’며 묻기에 ‘리어카 하나 살 돈 있으면 포장마차 하고 싶다’고 했지요. 당시 친구가 ‘동업’하자며 리어카 값 2만원을 줘 시작한 곳이 신촌 뒷골목이었어요.”
박 교수는 40여년 전 리어카로 방황하던 젊은 시절 일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405호실의 제자와 성악가 지망생들이 눈이 동그래지며 박 교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6개월간의 포장마차 시절, 연탄불 살리랴, 오뎅 국물 데우랴, 순경들 눈 피하랴, 참 고달프고 분주한 초보 장사꾼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장사가 끝나면 습관처럼 동생과 소주를 마셔야 했다. 주량은 소주 3~4병, 판 것보다 동생과 마신 술이 더 많았다. 취기 때문인지 콧노래가 새어나왔다. 동생의 놀란 눈을 보며 손으로 입을 막곤 했다. 가슴은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참담했다. 처가에서는 남의 귀한 딸 데려다 이 무슨 고생이냐며 성화가 대단했다.
“깨끗하게 실패를 인정해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업을 낭만으로 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제 성격이 무엇이든 즉흥적이라 결정 역시 빨랐어요. 더 이상 미련도 없었고, 마지막 밤, 동생과 함께 눈물 섞인 소주를 마시며 죽음을 생각했어요.”
모든 것이 암담했고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남지 않았을 때 ‘너를 살릴 것은 음악밖에 없다’며 리어카를 장만해 준 그 친구가 다시 찾아왔다. “돈을 댈 테니 넌 노래만 해라.” 친구의 권유는 끈질겼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끝에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황금기는 음악 속에서 있을 때였고 좌절과 방황, 굶주림과 번뇌 역시 행복으로 여겼지 않느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친구의 도움으로 하루 일곱시간의 재기공연을 준비하는 강행군이 시작됐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어떤 희생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로 매달렸다. 마침내 공연 첫날, 객석은 좌석 하나 남김없이 꽉 찼고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눈물을 삼키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언론에서 이번에는 상찬이 쏟아졌다. 긴 방황과 좌절 끝에 얻은 성공의 눈물은 감미로웠다. 자신이 선택한 음악인생에 회의를 갖게 한 언론의 가혹한 매질이 그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었고 죽음보다 더한 나락에 떨어지는 밑바닥 인생을 체험한 끝에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강철은 뜨거운 용광로의 혹독함 속에서 단련되듯이 젊은 날의 혹독했던 방황과 좌절은 새 도전 앞에 저를 더욱 강하게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습니다.”
미국 유학시절은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적이었지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미국과 캐나다, 남미 순회공연에서 오페라 주인공을 맡으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주역을 자주 맡게 되면서 그의 고질병이 또다시 도져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재채기만 해도 성대가 터져 목소리가 잠기는 제 고질병이 재발했습니다. 발성법이 나빴기 때문이죠. 잦은 공연으로 성대를 혹사하게 되면 모세혈관이 터져 2주 동안이나 노래를 못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출연 기회를 놓칠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서 훈련을 했고 기존의 발성법을 고쳤습니다.”
이때부터 그가 각종 문헌을 뒤져가며 훈련하고 연마한 발성법이 ‘벨칸토(bel canto) 창법’이다. 박 교수를 위기 때마다 구해준 것이 벨칸토 창법인 것이다.
“50대 후반에 들어서면 대부분 나이 탓에 성악가로서 위기가 옵니다. 고음이 못 올라가자 ‘목소리가 갔다’는 얘기가 들렸어요. 그래서 옛날 하던 발성법과 똑같은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문득 벨칸토시대 문헌이 생각났어요. ‘벨칸토시대 가수는 한번 마스터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청년의 젊은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전설의 발성법이라는 문구가 떠올랐어요. 그때부터 유럽과 미국을 찾아가 도서관을 뒤져서 문헌을 연구하고 또다시 연마한 끝에 ‘목소리가 살아났다’는 소리를 듣게 됐지요.”
이후 제자들과 결성한 ‘박인수와 음악친구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한국 성악의 세계화다. 그가 개발한 민요와 판소리를 서양 창법의 발성법과 접목하는 작업으로 30년째 이어지며 국내외 호응을 얻어 결실을 보고 있다. 이미 1980년대에 시작해 1997년부터 본격화한 한국 성악의 세계화 작업에 적극 동참하는 후배들이 늘기를 그는 기대하고 있다.
“민요 판소리를 세계화하는 일입니다. 서양 발성법을 안 바꾸면서 한국 민요 오페라를 통한 공연이 런던 파리 밀라노 등 유럽순회로 이루어지고 있고 미국은 해마다 하고 있는데 외국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것을 알리는 작업인데,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좋아합니다.”
인터뷰 = 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
그의 경력에 있어 최초의 실수는 바로 잘해 보겠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오페라 가수로서의 데뷔 무데에서의 실패,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전화 위복의 계기였다.
그런 좌절이 없었다면 박인수씨가 과연 그렇게 절실하게 노래를 불렀을까?
그의 인생에 실패라는 보약과 친구라는 보물이 있었기에, 국민 애창곡 <향수>가 세상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수로서는 좋은 목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가수로서 성공하기 위해 필수적인 좋은 성대 역시 완벽하지 않은
결함을 가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창법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했다. 결국 그는 가진 것을 보완하고 다듬어 가면서
칠순의 나이에도 노래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만의 세계, 그만의 생멸력을 얻은것이다.
변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장애물 없는 변화 없고, 좌절없는 성공 없다.
끊임없이 이미 자신이 가진 것을 보듬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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