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박승복(87) 샘표식품 회장은 22일 "모든 일은 장 담그듯 차근차근 정성을 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처음엔 그저 '간장 1위 업체 회장님'다운 표현 아니겠나 싶었다. 그러나 서울 필동 샘표식품 회장실에서 1시간여 만나 보니 63년 무적자 기업으로서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업계의 독보적 1위인 데도 간장을 비롯한 식품사업에만 전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간장이 제대로 숙성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박 회장은 기업이 확실히 성장했다고 볼 만한 시점을 멀리 보고 있었다. 그는 지난 5일 미수(米壽)를 맞아 회고록 '장수경영의 지혜'를 출간했다.
박 회장은 한국식산은행(현 산업은행) 근무를 시작으로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기획관리실장,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등을 거쳐 1976년 가업을 물려받았다. 공무원으로서의 다양한 경험이 경영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신군부 시절엔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샘표식품의 경기도 이천시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의 간장 공장이다. 4만2900㎡(1만3000평) 부지에서 연간 8만t의 간장을 생산한다. 일본 업체들은 작은 공장을 여러 개 갖고 있기 때문에 단일공장으로는 최대 규모다. 세계 3위 간장 제조업체의 생산기지를 짓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81년 공장 착공을 추진했으나 인허가 과정마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서류를 제출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정작 관공서에서 연락이 오면 수정안을 내라고 하기 일쑤였다. 완공까지 5년 넘게 걸렸다. 김종필(JP)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국무총리로 재직할 때 박 회장이 총리실에서 4년여 동안 함께 근무했으니 JP 측근 아니냐는 시선 때문이었다. 신군부가 부정축재 혐의로 JP 재산을 압류하며 압박했던 시절이다.
"전두환 정권은 나를 JP 꼬붕(부하)으로 봤던 거예요. 사실 그 시절엔 와이로(뇌물) 주면 좀 풀리긴 했는데, 늦더라도 법대로 했어요." 그는 "어떤 이유에서건 천천히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지, 과욕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힘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이런 신념이 무적자 경영을 이어가게 했다. 서둘러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다져가듯 했어요. 주부들이 장 담글 때 매일 장독대로 올라가 장독을 열어보고 성심성의껏 신경쓰는 것처럼 열정을 쏟으며 해야죠. 서두르거나 허욕을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2006년 샘표 60주년엔 '천천히 제대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는 "성과보다 과정, 남과 비교하는 최고보다는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직원 평가도 일시적 성과보다는 평소 태도로 판단한다.
"그래도 외형을 키우고, 사업을 다각화해 성장한 기업들을 보면 부럽지 않으세요"라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에이, 몇 곳 없잖아요. 다들 알 만한 기업 몇 곳 말고 사업 확장해서 성공한 기업 별로 없잖아요." 97년 외환위기 때 무리한 차입경영을 했던 곳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과욕을 부리지 않는 길이 옳았다고 느꼈다. 요즘도 기업들의 영역 넓히기 경쟁은 치열하지 않느냐고 묻자 "기업이 분수를 지켜야지…"라고 했다.
박 회장은 "천천히 하더라도 제대로 하기 위해선 한 우물을 넓고 깊게 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통장에 돈이 생기면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듯 사업 환경이 좋아지면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지기 마련이지만 간장 중심으로 식품 한 길만 고수했다"고 했다. 국내 간장시장 점유율 1위인 데도 식초, 물엿, 국수, 차, 깻잎 등 식품 테두리 안에서만 사업을 벌였다. "350년 전통의 세계 1위 업체 일본 기코망 간장을 이기면 그땐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겠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류에 따라 이익만 좇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매진하는 기업이 건강한 기업"이라고 했다.
그의 건강 비결은 식초. 80년대 초부터 하루 3번 식후에 식초를 물에 타서 마신다. 빈속에 마시면 안 되고 꼭 식후에 마셔야 한다고 했다. 박 회장은 98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유니세프(UNICEF) 부회장, 한국식품공업협회장 등 그의 표현대로 '월급 안 받는' 20여개 대외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유병석 기자 bs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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