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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이야기(CEO연구)

[CEO연구] 사기열전 인물로 본 인재경영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로 인하여 발생한 경제적 가치가 천문학적 규모에 이른다는 기사는 인재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인재가 조직을 흥하게 할 수도 있고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가 있다. <사기열전>에도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꾼 인재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변소에서 오줌을 받아먹는 굴욕을 당했지만 진나라의 재상이 된 범저,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불리지만 진시황에 대한 유세(遊說)에 실패해 독배를 들어야 했던 한비,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동원해 변법을 완성하지만 정작 그 법을 철저히 지킨 여관 주인의 신고로 죽게 된 상앙, 초나라 제후에게 도둑으로 몰려서 죽도록 얻어맞고도 ‘내 혀만 붙어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 장의 등이 바로 그들이다.”

국내 최고의 동양 고전 번역가로 알려진 김원중 건양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을 거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국내 최초의 <허사사전>을 선보인 이후 모두 25권의 저작(번역서 18권, 저서 7권)을 발간한 김 교수는 그 영웅들이 활약했던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하, 은, 주가 막을 내리자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가 시작됐는데, 역사는 이 시기를 가리켜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특히 춘추시대(BC 770~403)를 이은 전국시대(BC 403~221)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뤘던 7개의 제후국을 가리켜 ‘전국 7웅’이라 부른다. 그런데 천하를 통일한 주체는 당시 영토가 가장 넓었던 초(楚)나라도, 가장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었던 제(齊)나라도 아니었다. 천하 패권의 주도권을 행사한 것은 도리어 서쪽 구석의 가장 척박한 땅에 처박혀 있던 진(秦)나라였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리더의 포용력과 더불어 뛰어난 인재의 결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초의 장의와 이사, 위(魏)의 상앙과 범저, 한(韓)의 한비 등 유능한 인재가 모두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진으로 왔다.”


산고망원(山高望遠)과 토사구팽(兎死狗烹)

그렇다면 진나라가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몰려오게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김 교수가 태산에 갔을 때 찍었다며 보여준 한 장의 사진이 이와 관련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것은 바위에 음각된 ‘산고망원(山高望遠)’이란 글자였는데, ‘산이 높으면 멀리 볼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김 교수는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인재 중에서 이사를 제일 먼저 소개했다.

“이사는 초나라 하급 관리 시절 두 마리의 쥐를 보고 처세의 지혜를 터득했다. 관청 변소의 쥐는 인분을 먹다가도 사람의 기척에 화들짝 놀랐지만 식량 창고의 쥐는 느긋하게 쌀을 먹다가 사람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도 쥐와 다르지 않다. 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판단한 이사는 국경을 넘어 진나라로 들어갔다. 좋은 기회를 만나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믿었던 이사는 ‘외국인=간첩’을 주장하며 자신을 쫓아내려는 진나라 기득권 토착세력의 방해를 일거에 잠재우고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이사는 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라고 설파했는데, 그것은 ‘태산은 한줌의 흙도 버리지 않고, 황하와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진시황은 이사의 이른바 ‘인재개방론’에 적극 화답함으로써 연고를 벗어난 능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펼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했다. 이후 권력의 날개를 달게 된 이사는 군현제 실시와 문자, 화폐, 도량형의 통일 등 각종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고 나서 호해와 조고의 간계에 넘어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온갖 굴욕을 견뎌내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지만 정작 물러날 때를 알지 못해 몰락한 또 한명의 비극적 인물이 있다. 소하, 장량과 더불어 한 고조 유방의 3인방 측근으로 불렸던 한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동네 한량의 가랑이 밑에서도 천하를 보았던 한신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 소하의 추천을 받아 대장군의 자리에 오른다. ‘폐하가 한중의 왕으로 만족할 생각이라면 한신이 없어도 되겠지만 천하를 도모할 생각이라면 반드시 한신이 있어야 한다’고 소하가 간했을 정도로 한신은 영웅이었다. 실제로 한신은 유방이 ‘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많이 이끌 수 있겠느냐’고 묻자 ‘저는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라고 답했을 만큼 포부와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초심을 잃고 주인의 자리를 넘보다가 패망을 자초했다.”

한신이 처형을 당하며 남겼던 유명한 발언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반면 소하와 장량은 정권을 잡은 유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제나라를 갖고 싶다”고 했던 한신과 달리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답했다. 소하는 유방이 선물한 큰 재물도 반납했으며, 장량은 만년에 도인술과 양생술에 빠졌다. 그러자 아무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모가 뛰어난 인재라도 적이 없어지면 효용가치가 사라진다. 그럴 때는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소하와 장량은 그것을 알았고, 한신과 이사는 그것을 몰랐다. ‘달도 차면 기울기 마련이고, 정상에 도달하면 내리막길이 기다린다’고 말했던 범저도 물러날 때를 알았던 사람이다. ‘멈춤의 지혜’와 더불어 요구되는 것이 ‘협력의 지혜’인데, 조나라의 염파와 인상여가 이것을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다. 강대국 진나라가 약소국 조나라가 가지고 있던 보물인 ‘화씨의 벽’을 반강제로 빼앗으려 했다. 급히 발탁된 인상여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보물을 지켜내고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대장군 염파가 ‘세 치 혀만 놀리고 출세했다’면서 인상여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모욕을 주리라 벼르고 있었다.”


문경지교(刎頸之交)와 계명구도(鷄鳴狗盜)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인상여가 염파와 대면하는 것을 피하였다. 주변에서 “상관인 당신이 왜 피하느냐”고 묻자 인상여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염파와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가 가시나무 회초리 한 묶음을 짊어지고 염파를 찾아가 잘못을 빌었다. 두 사람은 목이 잘려도 변치 않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전국시대의 제후와 귀족들은 널리 인재를 구하는데 힘썼다. 그 중에서도 제나라의 실력자 맹상군이 인재 발굴에 가장 열성적이었다. 그의 문하에는 식객이 많았는데, 심지어 개처럼 도둑질을 잘 하는 자와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도 있었다. 맹상군이 이 두 사람을 빈객으로 대우하자 다른 사람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그런데 맹상군이 강대국인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정작 그를 살려낸 것은 학문이 뛰어난 식객들이 아니라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진나라 궁중의 보물 창고에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왔고, 또 한 사람은 닭 울음소리로 철통같은 함곡관 성문을 열었다. 이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는 천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때로는 요긴하게 쓸모가 있다는 교훈을 전해 준다.”

반면에 연나라 태자 단은 ‘낭만적 자객’ 형가를 시켜 무모하게 진시황 암살을 시도하다 망국을 재촉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 김 교수는 “인재는 소유하는 자의 몫이 아니다. 진정한 리더는 인재가 활동할 토양과 공간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재를 방치하지 말고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재를 부르는 포용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에 나오는 관중은 화살을 쏘아 제나라 환공을 죽이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화살이 혁대에 맞는 바람에 환공은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얼마 후에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환공에게 포숙아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관중을 새로운 책사로 추천했다. 당연히 환공은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결국에는 포숙아의 지속적인 간청을 받아들여 정적을 끌어안는 포용력을 발휘했다. 사실 역사의 승자와 패자는 인재를 얻는 자와 얻지 못하는 자로 구분된다. 다만 그것이 ‘현군(賢君)과 현신(賢臣)의 행복한 만남’으로 연결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공을 원하는 리더라면 인재가 조직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리더의 포용력과 참모의 헌신성이 조직을 강하게 만든다.”

정리 = 정지환 감사나눔신문 편집국장


김원중 교수의 이력

▲ 충남대 중문과 대학원 졸업
▲ 성균관대 중문과 문학 박사
▲ 대만중앙영구원 중국문철연구소 방문학자
▲ 대만사범대학 국문연구소 방문교수
<저서> 중국문화사, 중국문화의 이해, 2천년의 강의, 허사대사전(편), 허사소사전(편), 정사 삼국지(역), 삼국우사(역), 사기열전(역), 사기본기(역), 한비자(역), 송시(역)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