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가 강타하기 전인 2008년 하반기. 소형프린터 전문 제작업체 빅솔론의 오진섭 영업총괄 사장은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선진시장을 집중 공략할까, 아니면 미개척지인 신흥시장을 더 뚫어야 할까.’ 오 사장과 김형근 경영총괄 사장, 임원진은 치열한 토론과 분석 끝에 중동과 남미, 아프리카 등으로 시장을 더 넓히기로 결정했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동 빅솔론 본사에서 6일 만난 오 사장은 “그때 선택이 적중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북미와 유럽등 주요 선진국 기업들은 미국발 금융위기에 투자규모를 줄이는 등 너도나도 긴축 경영에 돌입했다. 이 때문에 해외시장, 특히 선진국 수출로 먹고사는 국내 기업들은 지난해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다.
빅솔론도 미국과 유럽시장에서는 전년보다 3%가량 매출이 감소했다. 하지만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 등으로 시장을 확대한 덕분에 위기는 거꾸로 ‘기회’가 됐다. 지난해 매출액만 650억원. 역대 최대 규모를 갈아치웠다.
빅솔론은 신용카드 등 결제를 할 때 ‘영수증’을 찍어내는 산업용 소형 프린터를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다. 요즘은 주로 pos(판매시점관리) 시스템에 적용되는 프린터를 제작한다. 음식점이나 할인마트, 택시나 피자 배달회사뿐 아니라 최근에는 도서관(번호표)이나 세탁소(보관증), 지폐계수기 등으로 POS 프린터 시장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2002년 설립된 빅솔론은 연평균 성장률 14%로 꾸준한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다.
빅솔론의 주요 경쟁사는 일본 업체 3∼4곳. 그 중에서도 전 세계 소형 프린터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프린터 제작전문회사 일본의 엡손이 최대 라이벌이다.
“철저하게 일본과 차별화된 전략만이 살길이죠.” 오 사장은 소형 프린터 시장에 뛰어든 이래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해외 바이어들을 통해 경쟁사, 특히 일본 제품의 약점을 면밀히 분석했다.
“일본은 기술과 품질 면에서 자기네가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하더라고요. 그렇지만 거래처와 일본 회사 간 커뮤니케이션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장에서 지적되는 제품에 대한 문제점을 회사 측이 수용하기보다는 자사 입장을 강조하며 넘어가려는 분위기가 짙더라고요.”
빅솔론은 일본 업체의 약점을 자사의 강점으로 키워나갔다. 무엇보다 거래처와 회사 간 밀접한 의사소통 구조를 만들어가는 데 힘을 쏟았다. 거래처에서 제기하는 문제점을 즉각 반영, 개선해 나갔다. 이를테면 독일의 뒤셀도르프에 거주하는 고객이 제품 품질에 불만을 토로하면 현지법인에 접수된 민원내용이 서울 본사까지 ‘각색’ 없이 전달되도록 의사소통 구조를 시스템화했다.
한번은 1년에 200개 정도 제품을 사가는 스웨덴 고객의 요구를 듣기 위해 엔지니어와 해외영업직원 2명이 스톡홀름에 출장간 적도 있다. 현지를 오가는 비용이 제품을 팔아 남기는 수익을 초과했다. 오 사장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손해를 감수하면서 얻은 값진 수확이 있다”고 귀띔했다. “빅솔론 프린터는 고장이 없다”는 입소문이었다. 빅솔론은 이 같은 노력으로 2002년 설립된 후 지난해 말 현재 전 세계 75개국에 수출 길을 뚫었다.
오 사장은 최근 일본 도요타 차량의 리콜파문 소식을 접하면서 ‘기술에 겸손해야 한다’는 초심을 되새겼다. 그는 직원 80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43명을 연구인력으로 두고 있지만 늘 긴장한다.
“이 업계는 기술이 생명입니다. ‘고장이 잦다’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끝이거든요.” 독과점에 가까운 업계 특성상 상호간 정보가 빠르고 파급 효과는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 소형 프린터 사업에 뛰어들었던 중국과 대만 업체가 5∼6년 만에 사업을 접게 된 이유도 잦은 고장에 이어 거래처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답은 고객이 갖고 있습니다. 고객 얘기를 무시하는 순간 회사는 자만에 빠지고 시장의 변화와 방향을 놓쳐버립니다. 고객은 이미 떠나간 뒤지요.” 도요타 사태가 주는 교훈을 다시 듣는 것 같았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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