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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의 도마일기

지금의 기독교, 이슬람에서 배워야

 

< 지금의 기독교, 이슬람에서 배워야>

 

흔히 기독교를 싫어 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꼽는 것이 바로 배타적인 성경해석과 구별된 백성이란 단어에서 잘못 추출해낸 선민의식과 강압적인 전도 방식들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완벽한 종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그들이 믿는 신이 완벽하고 그들의 메시아가 흠이 없는 존재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종교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을 마쳤다. 십자군 전쟁에서 신대륙 개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교란 이름으로 자행된 많은 만행이 그들의 종교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종교는 와ㄴ벽한데 그를 믿는 자들이 인간인지라 완벽하지 않다고 반문할 지 모른다. 인간은 불완전 하다. 기독교인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이 믿는 신념 체계인 기독교도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믿은 첵메에 모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슬프지만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예수라는 존재와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는 다른 종교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기독교인이냐고 물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캐톨릭이 아닌 이유는 유일신 사상이 근간임에도 마리아를 또다른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기 때문이고 이슬람이 아닌 이유는  마호메트는 메시아가 아니라 예언자라고 그들이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몰몬이니 여호와의 증인이니 흔히 이단이라고 하는 종교들은 인간이 그들의 필요성을 가미하여 강조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에서는 기독교의 쇠락에 대해 걱정하는 말들이 많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그들의 믿음과 삶을 일치 시키지 못한 때문인데 혹자는 사탄의 역사가 강성해진 때문이라거나 이 역시 하나님의 안배라는 해답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대안은 이미 있었다. 이슬람이 불과 10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7세기 경에 존재했던 전 세계 인구의 거의 3할 이상의 사람들을 개종 시킬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단 한가지만 빼고는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거든 예배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해 준것이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의 방식조차 인정해주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 분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의 삶을 주재한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야할 믿음의 증표를 예배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다 보니 그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바르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이 코란이란 형식으로 풀어졌기 때문에 강요에 의한 구속이 아니라 자발적 구속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작금의 교회를 한 번 살펴 보자. 교회에서는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를 우선 구분한다.  그 다음 어느 교단인지가 부분되고 그 다음 어느 교회인지가 구분되고 그 다음 어느 교구인지가 구분된다. 구분이 단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거기에는 동질성의 거리가 조금식 멀어지게 된다. 전도란 것은 진리라는 믿음의 세계로의 초대 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 유일성을 믿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그 다음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가장 중요한 예배에의 참여일 것이다. 이 두가지면 충분하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는 이런 중요한 것을 내팽겨치고 타 종교를 폄하하거나 그 신도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배타성을 심고 있다. 또한 신도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부흥이라 말한다. 전도의 열매라고 한다. 진정 그런가? 전도왕이라고 교회 게시판에 이름과 사진이 붙는 경우를 종종본다. 물론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겠다는 그들의 믿음이 낳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교회는 그 의미를 다단계 판매왕이나 보험왕처럼 포장해서는 안된다.  성경에는 분명 한 영혼이라고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전도요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그들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렬의 역사라고 적혀있다. 다만 사람이 할 것은 기도할 다름이라고 했다. 신앙을 신앙적임 방법으로 풀어야지 신앙을 기업 운영하듯이 해서는 안된다. 믿음 아니 구복을 빌미로 사업하듯 운영되는 종교, 주변에 흔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님을 안다면 지양해야 한다.

 

큰 교회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큰일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 큰일이라 예수가 했던 것 처럼 소외되고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교회 바깥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영화 <명량>에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능히 수만의 군대라도 막을 수 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믿음의 세계에 그런 사내가 나왔으면 싶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보여주는 행보는 그 사내에 대한 그리움의 일부를 달래준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교회에는 그런 지도자가 없지 않은가? 나는 기독교의 부활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부활을 더 간절히 바란다. 죽어서도 영혼이 있을 것이라 믿는자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을 기독교인이로 맏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주고 그저 예베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선한 양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 준다면 그것이 곧 부흥 아니겠는가? 예수 석가 마호메트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지 마라. 신앙의 원천은,신앙의 기본은 창조주인 유일신과 그 신에 대한 경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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