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지나던 제사장은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 역시 지나쳐버립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던 어느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발견하곤 기름과 포도주로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그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보존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했던 사람으로 아론의 후손들이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아마 그곳을 지나던 제사장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는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만 하는 정결의식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지키는 율법주의 자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자신에 대한 의무만 보였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며 강도만난 자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제사장을 보좌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운반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레위인도 제사장과 같은 이유로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고 맙니다.
그도 자신에 대한 책임만을 보았지 타인에 대한 아픔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구독하는 기독교 관련 카페 회원 메일에서 따온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일본의 지진 사태와 관련한 조용기 목사의 발언이 잠시 이슈가 되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소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조목사의 발언에 아멘하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일본만큼 귀신 이야기가 많고 그런 것에 대한 믿음이 강한 곳이 없으므로
한국 기독교에서는 일본을 우상이 난무하는 곳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목사님의 말처럼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성 발언이 이미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언성 발언이었을 때와 지금과 같이 현실이 되었을 때는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지금 일본은 강도를 당한 어떤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믿는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 아니면
강도에게 강도를 당한 강도인지조차도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은 강도를 당해 거의
죽음 직전에 간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의 일본국민들인 셈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기를 원했냐하면 "기름과 포도주로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그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까지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님이 그런 발언을 한것은 흡사
강도를 당한 사람을 만나고도 그냥 지나간 사람들, 즉 그들의 의무와 책임만 보았지 사랑과 아픔을
보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일까요?
조용기 목사를 비판하는 진중권류의 사람일까요? 아니면 마음속으로는 조용기 목사의 발언에
일단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고난을 당한 일본인을 도우려고 나선 기독교인들일까요?
아니면 기독교와는 상관없이 인지상정으로 측은지심이 발로된 한국의 일반 대중일까요?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예수님이 하신 이유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가르침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그렇다면 천국과 영생
혹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차치하고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그 가르침에 충실한
모든 이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일 것입니다. 물론 사회 지도층인사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하지만 비단 조용기 목사 뿐아니라 교회에서 훈련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줄 짐작할 수 있는 종교적 배경이 있는 진중권씨가 그런식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분란을
부추기는 것 역시 의무와 책임만 보았지 사랑과 아픔을 보지 못했다고 비춰지는 조용기 목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보여주는반증은 아닐까요?
물론 이 문제가 불거진 이유를 생각해 보면 순복음 교회는 기독교 방송을 통해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방송되므로 그 방송을 본 안티-기독교인이거나 혹은 그 설교를 듣고 나오는 어떤 교인의 말을 옅들은
누군가가(필시 기자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슈화하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 조차
기독교에서는 사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진중권과 같은 이빨꾼들은 "사회적 정의"를
위한 양식있는 시민의 정당한 문제 제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작금의 조-진의 충돌은 어느 일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다른 생각의
틀일 뿐이라 이해해 주는 또 다른 생각의 틀을 가진 사람들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우리 사회의
현상이라 여겨집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와 생각과 믿음이 상대를 도움이 필요한 강도 당한자로 여길 수 있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 처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도움이란 것이 감정적인 용어로 상대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겠지요.다만 그들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위를 상기시켜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인 Way 아닐까요?
나름 영혼과 내세에 대해 상당히 굳건한 믿음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기도교의 유일신 교리와
비록 선한 행위일지라도 예수와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없는 행위의 배경에는 사탄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이유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배타성과 함께
"예수 천국, 불신지옥"이라 말하는 기독교의 전도 행위가 그들의 내세의 상태를 협박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협박은 감정의 영역입니다.이성은 반박할 수는 있지만 협박할 수는 없습니다.
협박당한 감정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감정적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고 이런 거부감은
균형감있는 이성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으면 쉽게 협박으로 되받아치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균형있는 이성적 개입은 이런 감정의 교환이 끝에 덧씌운 이성의 파편과는 다릅니다.
균형은 이성으로 하여금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게 하지만 파편은 다름을 틀림이라 우길 수 있는
변명같은 말장난의 도구를 제공할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압니다. 전도라는 것이 인력으로 안된다는 것을, 믿음이 은혜라는 것을 그리고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예수를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예수를 전하는 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당신이 만약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자처한다면 비록 믿음이 다를지라도 그들 선한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상처입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아픔을 먼저 감싸는 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다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고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또한,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고를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계획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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