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의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에 대해- 불교]
한국이란 종교적 특수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와 대척점에 있는 종교가
불교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니 기독교를 한 축으로 볼 때면 다른 여러 종교가
기독교의 모순이나 기독교인의 잘못에 대해 그 대안을 가진 종교들과 한꺼번에
묶이기도 한다. 그래서 종교적인 논쟁이 있을 때면 적의 적은 나의 친구가 되는
논리에 의해 편이 갈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외관상 보면 불교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못하다. 기독교의 교리 때문이다.
유일신 여호와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그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기독교적인 악은 예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유일신 신앙을 부정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을 통틀어 사탄이라고 한다. 사탄은 유일신을 향한 신앙을 방해하는 것이
최대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부처는 어떤 기독교인들에게는 사탄으로 비친다.
대승 불교의 교리 중 첫째 계명이 보시, 즉 이타적 사랑의 실천이다.
이는 예수가 공생에 기간 동안에 몸소 보여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독교인들은 사탄이 때로 '광명의 천사'로도 드러나기 때문이라며
부처 역시 그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 교역자는 석탄일에 길거리에 걸려있는 연등을 보고
귀신이 걸려 있는 것 같아 뜯어 버리고 싶다는 말도 한다.
그렇다면 부처는 신이거나 타락한 천사이거나 그런 것인가?
온갖 잡귀신이 부처의 깨달음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부처는 그를 이기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면 부처는 귀신과 한 패거리가 될 수 없음에도 기독교인들이 배척해야 할 대상인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인 신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부처는 깨달은 자이기 신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불교도들도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불교는 다른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즉 부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부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배움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간이 신이 된 것을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 자체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는 성육신한 하나님
즉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살다 갔다고 믿는다.
인간을 사랑하사 그 죄악을 몸소 대속하기 위한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
온 것이다. 왜냐 하는 문제는 구약성경에 보면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 스스로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스스로 대속물이 될 수 박에 없었다.
여하튼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자체의 신성에 대한 믿음이다.
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 내용이 달라진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일을 하던
나사렛 사람 예수가 어린 시절부터 유대교의 전통과 교리에 열심이었다가 어느 날
세례 요한의 세례를 마친 후 그 당시 그 교파의 관습대로 광야로 나아갔고, 40일간의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기존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다
그 스스로 목숨을 내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약 40여 일을 다시 제자들과 함께 하다가 승천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신이 되었다. 문제는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 즉
신이 인간이 된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는 인간이 신이된 것을
주장하는 종교가 되고 만다. 또한 예수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한다면 신이 인간이 된 것이 입증되지 않은 채 인간이 신이 된 것만 입증된 결과이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교를 철학이라
정의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 상당한 논리적 결핍을 가져다 주는 요소이다.
또한 예수의 세례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어 ‘그는 내 아들이다’라고 했다거나
“아버지여 가능하다면 이 잔을 비켜가게 하옵소서. 다만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는 하나님 스스로의 독백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유치한 설정이다. 적어도 창조주가 이런 설정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이 된 기독교는 그 스스로 모순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이견의 해소는 그 인간이 원래 신이었음을 믿으라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삼위일체에 대해 이견이 없다. 전지전능의 창조주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건 신의 입장에서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창조주는 우리 인간과는
아주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바로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 설정을 하였다. 구약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의 관계에 있어 상호적인 관계를 가져가지 못했다.
그로 인해 신은 인간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공감할 수 있는 예수라는 대리인의 입장을
등장시킬 수 밖에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수 이후는 성령이라는 영혼의 메신저를 통해
요즘 말로 하면 소셜네트워킹을 하고 있는 것이라 나는 여긴다.
즉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신의 눈높이에 맞출 수 없음으로 신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관계 설정의 결과 예수라는 존재와 성령이라는 존재와 하나되는 삼위일체란 논리가
기독교적인 인간에게는 모순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의 신관(神觀)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처는 신이 아니었으나 후대의 사람들이 인간의 생로 병사와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부처를 설정하고 만다. 이러한 설정이 정규적인 종교행위로 이어지면서 인간
부처는 사라지고 신으로서의 부처만, 정확히는 인간에 의해 신이 된 그 설정이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본질을 안다면 굳이 부처와 불교를 배척하거나 사탄으로 내몰 이유가
없다. 물론 많은 불상들 때문에 우상 숭배의 문제가 생기지만 우리 말하는 불상이란
우상과 그 유상들이 종종 발휘하는 신통한 영험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불교에 붙은 무속일지 모른다. 기독교인이 스스로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면 그런 귀신과
관련된 그런 사람들을 치유하고 보듬고 예수의 도를 전해야지 그들을 배척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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