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올바르게 번역해야 한다.어느 성경이든 첫 머리부터 번역이 잘못되면 그 다음 구절부터 번역은 자동으로 잘못 전달되며 인식되어 읽는 이들로 하여금 혼돈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번역이 그만큼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데 오히려 교회부흥이나 성장, 성령의 은사, 표적 아니면 요즘 복지나 구제에 아니면 다른 곳에 목숨을 걸고 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라. 어디 교회성장이나 부흥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룬 구원을 전파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인데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어 자기 식의 해석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신약성경 첫 머리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구절이 우리에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대해 온 성경말씀이라 잘못된 번역이나 올바른 번역에 대한 개념도 없이 읽어온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를 생각하지 않고 접해 오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그 다음 구절부터 재미있는 내용으로 전개할 줄 알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 하는 산부인과 족보인줄 알았다.
그러나 첫 구절부터 우리에게 크나큰 의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접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적인 문화, 동양적인 문화로서도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인데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번역된 성경을 그대로 불문에 붙여 성경이 읽혀 왔던 것이 기독교의 역사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어떻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물론 혈육적인 전통에 의하면 그 어느 누구도 항변할 수 없는 명확한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다윗까지 그리고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과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해 출생된 예수 그리스도를 과연 누가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엄연히 자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정확히 살펴본다면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인간의 눈으로 그리고 제한적인 인간의 이성의 판단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숨어 있으며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골산 봉서방 성경공부를 하는 이들은 이런 내용을 접하다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만 아니라 전혀 생소한 내용을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성경은 son(아들)로 헬라어 성경에는 휘오우(ui`ou) 아들로 되어 있다. 그나마 자손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아들인 전혀 근처에도 가지 않는데 어떻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히브리어로 된 신약성경도 벤(!Be)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은 숨어 있는 단어이기에 아들이나 자손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벤은 아들로 표현하고 있지만 원래의 단어는 반(נ??)이란 단어로 아들이나 자손, 그밖에 다양한 번역으로 된 단어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고 있는 이 단어는 언약의 복음이 온전하게 세워진 상태를 이루어가고 있는 존재를 아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다윗의 생명의 근원이신 메시아 예수의 세계(책)가 펼쳐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마태복음 1장 1절의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단어의 번역으로 된 단어를 취사선택으로 인해 이런 곡해된 말씀을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어져야만 아브라함의 이삭을 낳고 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생명의 근원이신 메시아이신 예수를 이삭에게 이끌어갔으며 이삭이 생명의 근원이신 메시아이신 예수에게 인도했으며” 이런 식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낳아졌다고 하는 의미로만 전달하고 있으니 얼마나 차단된 상태로 읽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인간의 이해수준에 맞춘 단어를 나열하고 전달하고 있으니 성경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속 시원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덮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신약성경 마태, 마가, 누가를 같은 입장에서 본 성경이라면 신학적인 용어로 공관복음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사실마저도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당시 유대인인 마태, 마가, 요한이 될 수 있지만 누가는 이방인으로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이며 마태, 마가, 요한을 예수님 당시 예수를 직접 만났고 본 저자로서 공관, 즉 같은 입장에서 본 저자들이다.
이런 문제만 놓고도 올바른 인식된 신학적인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언약의 첫 번째 책으로 본다면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출애굽한 사건을 중심한 책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히브리어 제목으로 쉐모트(שמות)는 출애굽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두 번째 언약을 주는 책”이란 의미인데 출애굽한 사건이 부각되었다고 출애굽이란 책명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을 뜻을 곡해한 것이다.
레위기(ויקרא)라는 책도 “사명자에게 주시는 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각종 제사와 법을 제시한 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지면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지만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상을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 제한하는 것은 성령을 제한시키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이 아니라 족장으로 아브라함의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집을 지은 존재 중에 대표자인 아브라함”을 대표한 것이며 왕으로서 다윗을 대표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집을 지은 존재 중에 대표자”로 내세운 것뿐이다. 그런데 신앙의 대표자로 여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인본주의에서 나온 해석이다.
그들의 업적으로 인해 대표자들이 아니라 생명의 집과 법을 세운 존재로 메시아 사명자로 대행자로 청지기로 대표자일 뿐이다. 그들이 앞선 자로 후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며 이끌어낸 자로 대표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영웅이 아니라 생명과 성령의 법을 세우고 지켜나가면서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낳은 상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의 신앙 즉 하나님의 생명과 언약을 준수하며 생명의 근원이신 메시아 예수에게 인도하며 이끌어나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면 그냥 지나치며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신약성경 첫 성경인 마태복음도 원래 제목은 마태를 따라서 가면 메시아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제목의 책인데 단순히 마태복음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따라서 성경을 읽기 전 책 제목부터 제대로 번역되어져야 올바른 성경을 접근할 수 있으며 이해하게 된다.
이제 한국교회는 여기에 올바른 투자를 해야 하며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이 불 타 올라야 되며 열정을 갖고 메시아사상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창골산 봉서방 카페의 사명이 되었으면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이종남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