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가’ 대한민국, 일그러진 인권 |
[시평] 박상주 논설위원 |
언필칭 ‘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에서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도를 통한 평화적 삼보일배 시위 행렬이 경찰에 의해 제지를 당하고, 한 시민운동가의 가족은 인터넷 사용 내역을 국가정보원에 의해 낱낱이 감시당하고,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 온 한 지식인은 한꺼번에 4개의 대학에서 쫓겨났다.
집회 시위의 자유는 고사하고 보행의 자유마저 침해당하고, 개인 사생활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정부 반대세력에 대한 치졸한 보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국선언을 주도한 교원단체 간부들과 정부정책에 비판적이었던 방송 프로그램 작가의 이메일이 경찰에 의해 압수수색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묻는다. 과연 2009년 오늘의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인가?
▲ 지난달 31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출발해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삼보일배를 100여 미터 진행한 참가자들이 서울시의회 앞에서 경찰의 원천봉쇄에 막혔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이정희 의원, 유가족, 전국철거민연합 관계자 등 60여명이 참석한 이날 삼보일배 행렬은 침묵 속에 인도를 걷는 것이었다. 강 대표 등 국회의원 몇 명이 삼보일배를 하면서 앞장서고, 다른 시위대들은 두 손을 합장한 채 조용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민주노동당의 항의 그대로 다시 묻는다. 인도를 따라 침묵을 지키면서 조용히 행진하는 삼보일배를 막는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
누군가 당신 집안의 인터넷을 통째로 엿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더군다나 무시무시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오싹한 일인가. 곽동기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은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인터넷 회선 감청 및 국정원 감청 실태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이적표현물 제작 등)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지난해 6월12일부터 두 달 동안 집과 사무실의 인터넷 회선을 통째로 ‘패킷 감청’해 온 사실을 알게 됐다”고 폭로했다.
패킷 감청이란, 인터넷 회선에서 오가는 전자신호(패킷)를 중간에서 빼내 수사 대상자의 컴퓨터와 똑같은 화면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이다. 기존의 ‘인터넷 감청’은 이미 주고받은 전자우편을 나중에 열어 보는 것인데, 패킷 감청은 인터넷 검색이나 메신저 대화 내용, 파일 내려받기 등 모든 인터넷 사용 내용을 감시할 수 있다.
법원 영장에 따라 합법적으로 실시하는 감청이라고는 하지만, 가족의 전자우편과 웹 서핑 내역까지 파헤치는 저인망식 수사는 마땅히 보호돼야 하는 국민 사생활 영역을 침해하는 행위다.
하루아침에 4개 대학의 강단에서 쫓겨난 진중권 교수의 사례는 언급하기 조차 민망하다. 진 교수는 올해 들어 카이스트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중앙대, 홍익대 등으로부터 줄줄이 폐강 통보를 받았다. 진 교수의 재임용 거부에 항의하는 중앙대 학생들의 주장 그대로 그는 미학이론 및 문학이론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꾸준한 현실참여 활동으로 참여지식인의 전형이었고, 매 학기 수많은 청강생으로 붐볐던 우수한 교수였다.
이런 치졸한 보복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묻는 건 우문(愚問)이다. 아무리 밉더라도 숨이라도 돌려가며 차근차근 할 일이지 새 학기 수강신청까지 받아놓은 강의까지 없애는 건 황당무계한 처사다. 홍익대의 경우 이미 수강신청까지 다 받아놓았을 시점인 개학 3일 전 폐강 통보를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 박상주 논설위원 | ||
얼토당토않은 압력을 넣는 쪽이나, 그런 압력을 받았다고 고분고분 따르는 쪽이나 언죽번죽 유치하고 야만스럽다.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는 문명국에서 일어났다고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지성의 요람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행태들이 아닌가.
어느 민주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만일 앞서 열거한 사례들 중 어느 하나라도 선진국에서 벌어졌다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중차대한 사건들이다. 그럼에도 이 땅의 권력자들이 이런 비민주적인 일들을 드러내놓고 벌일 수 있는 건 그만큼 우리 국민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혼쭐이 난 역대 권력자들이 어디 한 둘 뿐이었던가. 이를 보지 못하는 권력의 오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
해당 학교들이 내세운 이유들도 군색하기 이를 데 없다. 진씨 스스로 그 자리들에 연연해 하지 않는 듯하고, 계약의 일방이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하니 법적으로 대항할 만한 사안도 못돼 논란이 더 확산될 것 같진 않다. 진씨의 강의를 듣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반발하지만 학교 당국이 입장을 바꿀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반발하는 학생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징계하겠다고 하는 판이다.
진씨 개인에 대한 평가는 뚜렷하게 엇갈린다. 진씨의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반대 쪽도 적지 않다. 그의 말들에 수긍하면서도 말투나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상당수인 것 같다. 그러나 진씨의 잇단 강단 축출은 그에 대한 호ㆍ불호와 상관없이 민주사회의 근간인 다양성을 부정하는 조치들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어느 곳보다 자유롭고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할 대학 사회마저 정권 코드 맞추기에 급급하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몇 달 전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민간은행의 후원사업이 갑자기 무산된 사실을 거론하며 국가정보원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을 때만 해도, 나는 박 이사에 대한 사회적 평판을 신뢰하면서도 어쩌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거나, 예외적인 경우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국정원이 개입했다기 보다 은행 측이 정권의 기류를 감지하고 과잉행동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 전 사장을 비롯해 현 정부 들어 문화부 산하 단체장들의 강제 퇴출 조치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인적 청산이라면, 진 교수나 신 교수, 또 진보적 시민단체들에 대한 재정적 압박 등의 조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동원한 간접적 청산 작업이라 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정권이라기보다, 지난 10년 동안의 실지를 회복하려는 보수세력의 전방위적 이념투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배후에 정권이 있든, 해당 대학이나 민간업체가 알아서 기었든, 그 행태는 완전히 독재시절의 판박이다. 지난 정권에서 사라졌던, 현 정권에서 되살아난 옛 권위주의 정권의 추억들이다.
'보이는 손'의 공격은 적극적 방어라도 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합법을 가장한 압박은 대응도 쉽지 않다. 이것은 또 그 효과가 특정 개인에 그치지 않고, 누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갖게 해 제도적 약자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든다. 까불면 다치니 조심하라는 무서운 경고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나의 공연한 망상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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