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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이야기(CEO연구)

[CEO연구] 선두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위기이다

 

"한국 경제는 이미 위급한 상황입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서 5~10년 후에 솔루션을 내놓을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단지 대다수 국민들이 이런 위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이론으로 유명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hristensen·58)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국 경제에 대한 경고부터 쏟아냈다.

세계 경제가 80년 만에 최악의 경기 침체에 빠졌다는 지난해,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대표 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지금, 한국 경제에 대한 칭찬은커녕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선두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위기"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개발한 파괴적 혁신 이론은 '잘 나가는 기업도 한방에 끝장날 수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업계 1위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로 첨단 신제품을 개발해 비싼 가격에 판매하는 것에 몰두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싸고 단순한 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에 야금야금 시장을 빼앗기고, 결국 몰락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사례를 들었다.
 
"고도 성장기에 일본 기업들은 앞서가고 있던 많은 미국 기업들을 파괴적 혁신을 통해서 추월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요타와 소니는 소형차와 트랜지스터 라디오처럼 아주 단순하고도 값싼 솔루션을 가지고 시장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한 발자국씩 고가 시장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1990년대가 되자 많은 일본 기업들이 시장의 정점에 올라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하이엔드(high-end) 시장을 점령한 기업들에 발생하는 문제는, 정점에 오르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성장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점에 오르면,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본 경제가 성장을 멈추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한국·대만·싱가포르에 있는 기업들이 과거 일본 기업들이 했던 똑같은 파괴적 혁신의 방법으로 일본 경제를 공략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많은 일본 기업들이 시장에서 쫓겨나는 운명이 됐죠."

그는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하드웨어는 중국이, 소프트웨어는 인도가 치고 올라오고 있죠. 이는 한국처럼 앞서 있는 국가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에요. 그들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위기가 선두 기업의 숙명이라면 대비책은 무엇일까? 크리스텐슨 교수의 대답은 "시장 밑바닥으로 다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재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시장 아래쪽인 로엔드(low-end)에서 치고 올라오는 위협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 기업들, 특히 하이얼 같은 기업들은 꾸준히 저가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래쪽에서 오는 위협이지요.

대기업들이 알아야 할 것은 시장에서 점점 하이엔드로 나아가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성장 가능성은 시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은 파괴(disruption)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기업이 다른 분야에서 스스로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은, 처음부터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지 모른다. 무엇보다 기존 조직이 변화를 싫어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텐슨 교수는 기존 조직과 별도로 다른 회사를 설립하거나 사업부문을 만드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