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으면서 일어난 엄청난 충격이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성전 미문에 날마다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던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어느 누구도 의심할 필요 없이 여기에 등장하는 앉은뱅이는 거지로서 동냥을 얻어먹고 사는 존재로만 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본인도 그렇게 알고만 있었던 부분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오시며”라는 대목에서 ‘나라’라는 단어를 관찰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단어는 왕권, 통치, 왕국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단어가 ‘바실류스’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주권자, 왕’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이 단어는 ‘바시스’ 힘의 기초인 ‘걸음, 발’ 이란 단어로 ‘걷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단어로 성격을 띠고 있다.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힘의 기초가 임하게 하옵시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걸음을 허락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의미한다. 막연히 유토피아적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 가운데 천국이 환상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추구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심지어 입신하거나 아니면 어느 충격에 의하여 천국을 갖다 왔다는 이들의 표현은 너무나 지나치게 황홀한 세계를 말하고 있다. 물론 얼마든지 그런 가상세계를 말한다고 해서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휘황찬란한 천국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국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천국에 대한 올바른 의미와 개념을 잘 모르고 말한다면 죄송하지만 천국을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유명한 바클레이 성경주석학자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천국이 없다고 실토를 한 적이 있다.(보이스사)
그러면 앉은뱅이와 나라라는 단어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라라는 단어와 연결된 단어 중에도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고통이란 ‘바사노스’라는 단어인데 마 4:24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는데 무엇을 어떻게 고통을 받고 있는지 내포하고 있다.
바실레이아와 연결된 바시스(걷다, 발, 걸음, 힘의 기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고통, 거기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즉 힘의 기초가 상실되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는 주님과 한 몸이 되어 걷는 것이라는 함수관계가 발견된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성전 미문에 와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구걸하는 것일까? 자기에게 필요한 돈일까? 아니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일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앉은뱅이라면 무엇을 구걸하고 싶은가?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 앞에서 앉은뱅이처럼 한 번 구걸을 해1본다면 어떨까?
여기서 구걸(엘레에에모쉬네에)이란 단어는 오히려 구제라는 단어로 번역되고 있는데 동정, 자선, 자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긍휼(엘레오스)라는 단어와 동의어로서 단순히 측은히 여기거나 불쌍히 여기는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단어로 가련한 심정으로 도와달라는 애틋함이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를 만큼 전율이 흘러내렸다. 앉은뱅이가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한 것은 돈도 먹을 것도 아닌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 것이라면 무엇일까? 한 평생 소원이 성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앉은뱅이는 불구자로서 몸이 온전치 못한 병신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율법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치 못하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켜 아무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의 어떤 노력이나 권력이나 그 어떤 것을 총동원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전도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처럼 오로지 성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성전에 마음대로 들어가는 사람을 붙들고 나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구걸)해 본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런 마음이라도 가진 적이 있었는가?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라. 앉은뱅이를 메고 온 사람들은 성전 앞에 갖다 놔 줄 수는 있어도 앉은뱅이와 함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전도해서 예배당만 데리고 온다고 다 된 줄로 착각하지 마라. 내 남편이나 가족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예수 믿게 해달라고 그렇게 떼를 쓰며 기도하여 예배당에 나오게 된 그 후로부터 기도가 간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앉은뱅이로부터 자유 함을 얻는 은총을 입어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의 간절한 구걸을 거부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다. 그 말을 들은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게 된 놀라운 사건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도 일어나야 한다.
우리 주변에 이런 앉은뱅이가 얼마나 많은지 신앙 생활하다가 중간에 자포자기 포기하는 분들이 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아니면 자기만의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주저앉아 버리는 일들이 허다하다. 주님과 한 몸이 되어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무슨 의미인지 선지자 “나비”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앉은뱅이가 구했던 오직 한 가지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있는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심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으면서 모를 것 같기도 한 것이라도 있는가? 앉은뱅이는 다름이 아닌 천국도 지옥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위에서 언급한 ‘바사노스’라는 단어는 지옥으로 가고 있는 상태의 고통으로 걷고 있다는 뜻이다.어쩌면 마 23:13에 천국 문 앞에서 자기도 못 들어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게 하는 존재가 바로 앉은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맨 날 교회 와서 기도하고 봉사해도 앉은뱅이와 다를 바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차라리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앉은뱅이가 되라! 그리고 예수를 믿게 하는데 낚시 밥으로 낚아 예수 믿게 하는 짓을 하지마라.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만 해야 된다.
예수 믿게 하는 것이 단순히 예배당에 나오게 하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성전 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2:12~13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는 말씀을 잊지 말라. 항상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베드로와 요한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권세를 발휘해야 한다.
이준호목사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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