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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이야기(CEO연구)

[CEO연구] 사옥 보다 공장

 

 

우리나라에서 부를 일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아마도 개인, 기업을 막론하고 부동산이라는 답이 제일 많을 것이다. 그런데 기업 가운데에서도 연구·개발(r&d)이나 설비 확장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사옥은 월세 살이를 고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 중 상당 수는 외형보다는 내실에 치중한 경영을 실천하는 경우다. 

유제품 업계의 맞수로 유명한 남양유업과 매일유업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건실한 흑자 경영을 유지해온 두 업체 모두 자체 사옥이 없다는 점이다. 남양유업은 서울 을지로입구 신한은행 본점 옆 대일빌딩에 세 들어 있고, 매일유업은 서울 창덕궁 맞은 편 삼환기업 사옥에 더부살이 중이다.

1969년 매일유업을 창업한 고 김복용 회장은 생전에 자주 “으리으리한 빌딩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해, 본사가 이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980년에는 당시로서는 새 건물이었던 서울 서소문동 동아빌딩으로 본사를 옮겼는데, 9개월 만에 장충동 태광빌딩으로 재이전했다. “주 고객인 농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물로 옮겨야 한다”는 김 전 회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1964년 남양유업을 창업한 고 홍두영 회장은 아예 ‘무사옥’이 경영이념 가운데 하나였다. 무사옥은 무차입·무분규·무로열티와 함께 ‘4무(無) 경영’의 한 요소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지난 2008년 1000억원을 들여 전남 나주에 호남공장을 짓고 올해도 200억원을 들여 충남 공주에 중앙연구소를 새로 만들었지만, 본사는 월세 신세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창업돼 6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샘표식품도 비슷하다. 1969년 서울 창동으로 본사와 공장을 옮겨갔다가 2001년 공장은 이천으로 이전하고 본사는 애초 본거지였던 충무로로 되돌아왔는데, 이때 매일경제신문사 구관에 입주해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사옥보다는 공장에 돈을 쓰는 게 맞다”라는 박승복 회장의 지론 때문이었다. 유기농과 웰빙식품 바람을 타고 매출 1조원을 넘긴 풀무원도 “사옥이나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남승우 사장의 방침에 따라 본사는 서울 수서동 한 건물에 임대로 입주해있다. 

벤처기업, 빌딩에 모험 걸지 않는다. 업종 특성상 벤처·인터넷 기업도 무사옥인 경우가 많다. 온라인 도서·음반 판매 1위 업체인 ‘예스(yes)24’는 최근 5~6년 사이 서울 양재동에서 여의도로, 또 여의도 안에서도 이사를 자주 다녔다. 본사의 이런 잦은 이사에는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김동녕 회장의 생각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업무에 필수적인 물류 창고는 경기 수원에서 파주로 옮기며 임대에서 자체 소유로 바꿨다.

포털업체인 다음도 지난해 말 서울 양재동과 홍익대 앞으로 나눠져 있던 서울 사옥을 한남동으로 통합·이전했지만 여전히 임대를 유지하고 있다. 다음 한 직원은 “창업자(이재웅 전 대표)가 사옥 마련에는 거리를 뒀고, 이게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벤처기업협회 허영구 정책팀장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매출 1000억 클럽’에 포함된 242개 회원사 가운데 최소한 절반 이상은 자체 사옥을 가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기업 가운데서는 매출 4조8000억여원으로 재계 33위권(공기업 제외)인 웅진그룹이 자체 사옥이 없다. 출판 계열인 웅진씽크빅이 파주 출판단지에 자가 사옥을 두고 있지만, 생활가전 등 주력 계열사 대부분과 지주회사는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을 빌려 쓰고 있다. 이 회사 윤석금 회장은 과거 여러 차례 “기업이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업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회사 규모가 커진 뒤로는 사옥 마련을 검토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자체 사옥이 없는 기업들은 대개 곁눈 팔지 않는 한 우물 경영을 실천해왔다. 남양유업은 지난해 1조 매출에 1000억 순이익을 거뒀고, 매일유업도 8000억원대 매출로 내실을 다졌다. 지난해 1800억원대 매출에 70억원 가까운 순이익을 올린 샘표식품은 만년 무적자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식품업계에 무사옥 기업이 많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떤 업종보다도 소비자 신뢰가 중요한 먹을 거리 업계에 무사옥 업체가 많다는 얘기는, 무사옥 기업들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그만큼 많이 얻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사옥 자체가 경쟁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옥이 없는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생산설비 확충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투자를 아끼지 않지만 부동산 등 전문영역 이외의 사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의 원칙”이라며 “조직 내 열정과 자금, 인력을 한 곳에 모을 때 그 역량은 배가되지만 여기저기에 관심을 두어 힘을 분산하게 되면 어느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