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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잡생각들

화분에 물을 주면서

 

죽음에 관한 세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 죽는다,

-죽을 때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다.

 이다.

 

반면에 죽음의 불확실한 세 가지가 있다,

- 언제 죽을지,

- 어떻게 죽을지, 

- 어디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에 농으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세상에 오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가는 것은 모른다.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르며, 죽는 것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 다.

 

인간이기에 피할수 없는 것, 그리고 가장 인간다운 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삶에 대한 집착이 컷던 만큼 죽음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있다. 

진시황은 죽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던 사람이고 ,

수많은 도가의 제자들이 죽음을 초탈하려는 노력으로 신선이나 도사가 되려했지만

결국 진시황과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이 대안 없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신에 귀의하고, 득도를 위해 용맹정진한다.

그런 노력을 통해 우리가 한가지 얻은 대안 아닌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는 연기론이나 윤회론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서의 또 다른

삶이 있음에 대한 믿음,이런 믿음들에 대한 체험적 진실로 인구에 회자하는 유령

이야기나 귀신이야기, 그리고 뱀파이어나 좀비들...

이런 것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죽음 이후에 죽지 않았음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달리말해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또다른 삶의 관문이라 여기는 것이다.

좀 궤변스럽게 말하면 인간은 죽어야만 산다는 것을 믿고 사는 존재이다. 

 

한편 종교가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종교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한 정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그들은 생물로서의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생물로서의 인간이 무생물로서의 존재하는 것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다른 형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은 종교의 입장과 차이가 없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 역시 더 작은 세계로 들어가면

에너지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양자 역학은 과학이다.

그리고 이 과학은 '에너지 불변'을  법칙이라 말한다.

다시말해 우리의 에너지(다른 형태의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이다.

따라서 죽어도 우리는 죽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대한 현상에 대한 접근이다.

하지만 인간은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존재이다.

만약 보이는 것만이 다이고 보이는 것만 믿고 사는 존재였다면

인간은 그저 동물이요,생물이요, 지구에 포함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구별짓는 것은 바로 삶의 의미다. 

그런데 묘하게 우리 인간의 삶의 의미는 살아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은 변한다.

 

하지만 많은 인간들이 죽음으로써 그들 삶의 의미를 완결하고는 했다. 

살아 있음으로써 가시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배제됨으로써 한 인간의 삶의 의미는 

그 스스로에 의해서라기 보다 살아 있는 타인들에 의해 정의되고 평가되고 완결지어진다. 

때로는 죽음을 통해 그의 삶이 완성되는 경우도 많다. 

예수가 그랬고,소크라테스가 그랬고,이순신이 그랬고,안중근이 그랬고,

윤심덕이 그랬고, 이수현이 그랬고, 노무현이 그랬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죽음의 순간에 혹은 그 순간을 위해 남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죽음의 선택이 삶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죽음이 그렇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지만

막상 삶의 도피를 목적으로 선택한 죽음은 그저 도피일 따름이다.

그것들에는 완결 혹은 완성을 위한 삶의 의미가 2푼 부족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의 죽음의 의미는 '2푼 부족한 죽음'이다.

 

오늘 아침 화초에 물을 주면서 시들어 색이 바랜 꽃잎과 아직 본래의 색감을 잃지 않은 꽃잎이

같은 화분에 담기어 햇빛을 쬐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득 내 삶을 생각했다.

그리고 삶의 한 켠에 같이 존재하고 있을 나의 죽음과 내 삶의 의미가 떠올랐다. 

 

왼쪽 가슴 언저리를 만져본다.

아직 뛴다. 그리고 따뜻하다.

 

언제가 나의 죽음 뒤에 남겨질 삶들이

나의 삶을 2푼 부족한 삶으로 생각하지 않도록하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내 삶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일 것이다.

클라이막스와 완결과 반전을 꿈꾸는 시나리오.... 

 

(쓰고 보니 또 용두사미격에 뻔한 주제에 대한 소음이 되고 말았네... 아! 이 우둔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