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조용합니다.
평소 같으면 아니 억수가 쏟아져도 도로는 차가 그칠 줄 몰랐는데,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에도
동네 유흥가 어귀의 비틀거리는 발길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참 조용합니다.
하늘을 폴폴 날아다니던 그 가벼운 눈송이가 이런 위력을 발휘하는지 새삼스럽습니다.
집 주변에 고개가 많아 그런지 도로를 지나는 차는 30분에 한 두대 정도군요.
뉴스에서는 폭설 예보를 못한 기상청이 잘못을 했느니 마느니 하는 소란이 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그런 소란은 지금 이 밤의 풍경이 주는 의미 앞에서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기고만장하던 인간이, 그 기고만장을 감싸주던 도시가 이렇듯 조용해졌습니다.
오늘은 많은 연인들이 기대하는 발렌타인데이 입니다.
어릴적 부터 이런 외제품에 별로 흥미를 두지 않는 성미이고,
그런 반골기질 때문에 궁색한 변명으로 7월 7석날을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세상살이가 이런 저런 핑게를 대고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는 억지스런 환경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됩니다. 그래서 저도 나름 화이트 발렌다인데이라는 말에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거리에 주차해둔 차들 위를 희게 뒤덮은 얇은 눈을 보면서
오늘 아이들과 어떤 가족 행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오전에는 아내에게 과외 오는 아이들과 동네를 돌며 눈싸움도 했습니다.
한 시간 공부하는 것보다는 눈이 귀한 부산에서 눈싸움을 할 수 있는 여건을 활용하여
그들에게 추억을 만들게 하는 것이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아이들 편에서 아내를 설득했지요.
손이 시렵다길래 집에 있는 장갑이란 장갑은 다 찾아서 주었습니다.
심지어 제 골프 장갑도 화려했던 눈싸움의 상처를 안고 지금 제 사무실 선반위에 걸려 있을 정도입니다.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이 눈에 대한 추억이 오래가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서 계속되는 눈 발은 낭만을 걷어내었고 이런 저런 걱정들이 눈을 밟고 다가섭니다.
사무실 주변의 도로에서 그저 겁에 질린 사람들이 갇힌 쇳덩이로 전락해 미끌어져 내려가는 차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 모양이 흡사 우리 강아지가 내리막 눈길을 내려가는 듯이 엉거주춤해 보여 실소를 머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학과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딸아이의 귀가가 걱정되었습니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는 모처럼에 눈에 들떠있습니다.
" 절대 손넣고 다니면 안된다! 넘어지면 크게 다치니 간단한 목장갑이라도 사서 손빼고 걷거라!"
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입니다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문자를 보냅니다.
왜 딸아이는 나이가 들수록 더 걱정하게되는건지.....ㅎㅎ
나 같은 남자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란 다소 이율 배반적인 대답이 언뜻 머리를 스쳐갑니다.
지금 가족들은 모처럼의 눈장난 탓에 피곤한지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습니다.
담배 피러 나왔다가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다보니 동네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잡생각들이 스쳐갑니다.
반가움으로 왔다가 걱정도 던져주고 또 오랜 만에 이런 조용한 도시의 밤을 선사하는 눈에 대해
끄적여 봅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인생을 생각해봅니다.
도시를 마비시키는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있지만
집앞에 쌓인 소담한 그 모습에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눈이라는 자연현상,
한 때 내가 가졌던 내 삶에 흔적에 대한 기대가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마음 한 석은 아직 그 '한 때' 속에 아직 있다고 생각하게 하지만
다른 한 구석에는
"5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아직 비가 될지, 눈이 될지 그냥 햇빛가리게가 될지 고민하는
구름같은 모습이 바로 지금의 네가 아니냐?"라는 반성문 읽기가 시작됩니다.
올해의 제 목표는 " 50이 되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10가지"라는 테마로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사소한 것에서 제법 굵직한 것에 이르기 가지 여러 생각을 적었습니다만
그 중 3~4개는 3개년 계획을 새워야 하는 것들입니다.
50의 나이를 기다리는 나는
아직 세월을 기다릴 수 있지만
이미 '조금 더 기다려 주십사'청하기에는 늦어 버린 분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집니다.
언젠가 이런 눈이 부산에 또 내릴 쯤에는 지금 이런 소회를 공유할 수 없는 그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마음을 서두르게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지금"을 더 생각하게 되나 봅니다.
지금 이 시간, 모두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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