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던 청각 장애 소녀는 상대의 입 모양과 물건을 연결하면서 생활 속 단어를 하나씩 배워갔다. "세계 방랑 때 만난 사람들 덕분에 이 책을 쓰게 됐어요. 같이 여행하면서 제 사연을 말하면 다들 놀랐어요. 그러면서 자기들도 의욕이 생겼다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어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삶에서 힘을 낸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나 쓸모있는 사람이구나그 사실에 전율했어요."
귀가 들리지 않지만 4개 국어를 하는 한국의 헬렌 켈러 김수림(40)씨는 2일 본지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과 도전을 정리한 자서전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것은 없다(웅진지식하우스)의 한국어 번역판을 낸 그는 오른쪽 귀는 들리지 않고 왼쪽은 보청기를 끼고 자동차 경적 소리를 겨우 듣는 정도다.
그런데도 상대의 입 모양만 보고 한국어와 일본어·영어·스페인어를 능숙하게 하고, 세계적 금융회사인 골드만삭스에 이어 지금은 일본 도쿄 크레디트스위스에서 법무심사관으로 일한다. 작년 4월 일본에서 일본어로 먼저 출간,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에서 그는 귀가 안 들리는 이대로가 좋다. 귀가 안 들리기 때문에 지금의 나, 김수림이 됐으니까라고 말한다.
김씨의 삶은 신산(辛酸)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네 살 때 처음 본 아버지는 그를 시골 먼 친척집에 버렸다. 여섯 살 때 청력을 완전히 잃었고 돈 벌어서 돌아온다고 떠났던 엄마는 4년 만에 씨 다른 동생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 직후 엄마를 따라 건너간 일본. 밥 가게인 줄 알았던 엄마의 가게는 술집이었다. 엄마는 그를 일본인 친구 집에 4년간 맡겼다.
김씨는 살아남기 위해 일본어를, 살아갈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 영어를, 보다 많은 친구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 위해 스페인어를 익혔다. 1991년 고교 졸업 후 영국에서 2년간 어학연수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단기대학을 졸업하고 한 제지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4년 후 우울증에 빠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3년간 30개국을 여행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웠다. 이후 외국어 능력을 살려 골드만삭스에 입사했고, 투자상담사 자격증을 땄다.
김씨가 역경을 견뎌낸 비결은 타고난 적극성. 그는 친구들이 놀리면 웃으며 "네 말이 맞다"고 맞장구쳐줬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 고등학교 성적도 꼴등에서 3등으로 올렸다. 영어를 배운 과정은 눈물겹다. "I라는 단어를 익히기 위해 선생님의 입과 목을 손으로 만져 혀의 움직임, 목의 진동, 입에서 나오는 공기의 세기, 이의 맞물림 등을 그대로 따라 했어요. 그러고선 잊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아이, 아이, 아이를 소리 냈지요."
김씨는 "책으로 써 놓고 보니 마냥 긍정적인 것 같은데, 남모를 고비는 분명 있었다"고 말했다. 두 번의 지독한 우울증을 겪은 끝에 그가 얻은 해결책은 대화, 상상력 그리고 다정함이었다. "막무가내로 나 안 들리니깐 도와줘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는 이렇게 말해요. 여기서 당신이 저를 조금만 도와주면 이걸 할 수 있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잘 도와줘요."
지금 김씨는 성실한 남편, 네 살배기 딸과 함께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얼마 전 아이가 보육원에서 배운 노래 악보도 구했다. 그가 말했다. "아리스(딸)와 같이 노래하려고요. 아시겠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저는 음치 중의 음치예요. 제가 노래를 부르면 아리스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지요. 뭐 어때요.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어요. 같이 즐길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그게 중요하니까요."
조선일보 김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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