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썸 >
오빠, 나를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오늘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의 패배감을 달래기 위해 아니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 속에서 ‘나는 다르지’의 이유를 찾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전작이 있었고 이미 3차로 둥지를 튼 식당이라 첫잔만 의례적인 건배를 하고는 이내 이야기꺼리와 서로 할 말이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갈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즈음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하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심야 우등버스의 시간에 견주에 언제 일어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시끄러워서 귀엣말로 한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오빠라... 이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남다르게 데면데면하게 대하기도 했거니와 인사도 잘 안하던 그녀, 두어 달 전에 여럿이 술자리를 한 번 같이 했었다. 그때 그녀에 대한 나의 짧은 소감을 한 마디 전했던 것이 개인적인 대화의 전부였다. 센척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을 의식해 일어서려하기 때문에 더 많이 다친다고. 40대 중반의 내 모습이 엿보여 했던 말이다. 궁금은 했었다. 왜 저런 모습을 자신의 트레드 마크로 삼고 있는지가. 물론 동료로서의 안타까움이 확장된 오지랍 정도였다.
송년회 자리였다. 저녁 식사시간에는 별로 말을 섞지도 않았고 한 번 술자리를 같이 한 정도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강남의 한 노래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스무 명 정도가 술과 노래와 춤으로 송년회라는 형식을 채우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술자리를 가지지 않은지도 10년이 넘은 지라 이제는 별로 그런 자리가 편치 않아 주변에 서서 박수만 치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나를 떠밀더니 무리들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내가 맴돌고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저 아무런 말없이 눈짓으로 ‘좀 놀아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깔린 멍석을 마다않는 예전의 직업병이 도져 소위 7080댄스로 무리의 흥을 돋웠다. 그리고 건물 복도에 마련된 흡연석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녀가 불쑥 코트를 챙겨 입고 나와 옆에 앉았다.
어제 홍콩 갔다가 지금 막 공항에서 이리 온 거예요.
홍콩은 왜?
일이 좀 있어서.
바쁘시구나.
피곤해서 더는 못 있겠어요.
집에 가요
대리를 불렀는데 안 오네요.
언제 가세요?
좀 있다 심야버스 타고 내려가야죠.
주무시고 가시지, 피곤하지 않으세요?
나이가 들면 객지 잠자리가 더 불편해져요.
얼마나 드셨다고 나이 타령이세요.
ㅎㅎㅎ
이박사, 호텔 잡는다는데 같이 잡아드려요?
아니 괜찮아요.
뭔가 답을 해야 했다.
글쎄... 보이는 게 다는 아닌데 그런 액면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철부지?
뭐야~
그녀는 또 남자 행세를 하며 다른 사람 보기에 그저 그런 이야기에 대한 반응인 듯 내 팔꿈치를 툭 치고는 옆자리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편안히 내 왼쪽에 등을 기대고는 오징어 하나를 잡고 옆자리의 대화에 여자들이 흔히 하는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코트에 붙은 자신의 목도리를 주머니에 넣는 시늉을 하다가 네 손에 쥐어 주며 갈 때 돌려 달란다. 내 목에 감았다. 그리고 따라오면 돌려줄게라고 말할 뻔 했다. 예전에는 망설이지 않고 날렸을 그 멘트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왜지?
자 드세요, 드세요.
왜 자꾸 술을 권해?
제가 그리 쉬운 여자가 아니거든요. 이렇게 오래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아요.
그런데?
제가 술을 마시는데 같이 드셔야죠.
왜?
아이 참! 이 아저씨~ 말 많네.
제가 술 마시는 날은요 새벽 4시 포장마차에서 헤어질 각오를 해야 하는 날이에요.
4시에 헤어지면 난 어디서 뭘 하냐~
그럼 내가 호텔 잡아줄게!
책임질 거야?
뭔 책임요~
호텔비~
호텔비는 남자가 내는 거에요~
화장실을 다녀 온 그녀가 다시 내 옆자리에 앉는다. 큰 목소리가 시끄러워 피해 앉는 것인데 저리 가랄 수도 없고. 그런데 또 뜬금없이 묻는다.
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구 대상이야.
뭔 연구?
니가 읽어 달라는 것이 뭔지 몰라서 연구 좀 해봐야겠어.
뭘 읽어?
니 질문이 그렇잖아. 답을 원하는 거 아니지?
오라버니 어렵다~
지퍼를 올리지 않아 적당히 살집 잡힌 뽀얀 아랫배가 보였다.
귓속말로 ‘지퍼’ ‘네?’ ‘지퍼 지퍼!’
잘못 알아들었는지 코트 단추를 더듬다 화들짝 지퍼를 올린다.
이 아저씨도 참~ 그런 걸...
괜찮아, 다른 사람 보기 전에 내가 말해 준 것 뿐이야.
다른 사람이 뭘요?
나도 종종 그래~ 나이가 든 거야.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자리 파하죠.
그럽시다.
택시를 타고 강남 터미널에 도착했다.
1시30분 부산행.
시간이 좀 남아 대합실에 앉아 책을 꺼내 들었다.
마주 앉은 커플이 다른 사람 눈을 의식도 않고 마주 보며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다.
자기야, 나 어떻게 생각해?
왜 물어?
아니 나 어떻게 생각하냐구~
알잖아~
아니 어떻게 생각해엥~
남자 녀석이 조용히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
여자는 묘한 미소를 머금고 어께에 머리를 파묻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의 목을 깨문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저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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