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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의 도마일기

교인과 믿는자

 

특정교회를 권유함이 없이 복음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도 있으나 이는 극히 드문 일이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전도할 때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라는 말과 더불어 특정교회의 이름과 소재지의 약도가 인쇄된 전도지를 건네주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들이 상대가 기독교인인 줄 알면 "예수를 믿으시는군요" 라는 말보다 "교회에 나가시는군요, 어느 교회에 나가시지요?" 라고 묻는 것이 또한 상례입니다.

 
이와 같은 대화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의 동일한 관심과 고정관념을 읽게 됩니다.
먼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이전에 특정교회의 교인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고,
비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기 전에 교회의 교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제도적으로 발전하면서 교회(에클레시아)의 의미가‘성도의 무리’라는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교회라고 하면 제도적으로 운영되는 특정 지역의 물적 시설과 인적 조직을 의미하고
교인은 그 건물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등록된 조직원들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교회에 다니는 것을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생활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사회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하나의 취미나 여가활동 또는 사회적인 교제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므로
그와 같은 대화가 오가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생활이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으로 남에게 못할 짓 아니하고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종교란 모두 같은 것으로 불교, 유교, 기독교 등 다 그게 그것이 아니냐고 정의합니다.

기독교가 비기독교인들에게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한 원인은
기독교가 기독교답지 못한 양상(樣相)을 이 사회에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고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경제적 부와 육체적 건강 등 삶의 만사형통을 위한 기복적인 교회,
주고(헌금, 기도, 봉사) 받는(건강, 재물, 명예) 조건부적인 교회로 생각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특정 교회에서 예배의식에 참석하고 성도의 교제를 해야만 하는 조건이나 의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상적 삶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즉 성경말씀의 생활화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들 중에서,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말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루고 있음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질을 외면하고 양적 모습만 보는 단견입니다.
그들은 이미 영적 생활예배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일예배나 수요일 저녁예배, 금요일 철야 기도회나 새벽 기도회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해서 바로 선 교회이며
진실한 신앙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과의 TV 좌담에서 한국인의 이웃사랑과 외국인의 이웃사랑을 비교하는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한국인은 인정이 많다고 하면서 그 사랑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혈연이나 지연 등의 인연이라는 인맥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유럽인은 인정은 없어 보이지만 사랑의 대상은 어떤 인연이라는 인맥을 초월하여
범인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비록 겉으로 보이는 교회의 모습은 쇠퇴의 길을 보이고 있으나 그들의 사회생활의 모습은
이미 성경적으로 관습화 된 삶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도교회의  예배의식만이 진실한 성도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영성의 은혜로 스스로 성경을 보고 깨달아 확실한 자기 신앙을 견지하는 열심과
땀과 눈물이 배인 목회자의 지도와 권면, 경책, 징계 등으로 나타나는
진실한 사랑의 교제가 있는 공동체라야 비로소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가 예수 믿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그가 어느 교회에 출석하든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반드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만 출석해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 교회가 대형 교회로 성장해야 한다는 기업적인 사고방식이
오늘의 기독교를 타락시키고 뒤틀리게 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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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경을 지나가시다가 물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21-23)

이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예배는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의식에 고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영(Spirit)적 진리(Truth)를 추구하는 삶이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상적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 진리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요 4:24).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우상은 영이 아닌 가시적인 존재, 즉 인간이 손으로 가공한 존재이므로
그 우상에 대한 예배는 가시적인 의식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그 우상은 특정 지역에 고정되므로 예배 역시 그 우상이 세워진 곳에서만 가시적으로 행하는 의식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번역된 말씀을,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예배 시간에 교인들이 지켜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문구는 그러한 정서와 견해를 가능케 하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뒤뜰에 정화수 떠놓고 목욕재계한 후 신령에게 치성 드리는 무속적인 뉘앙스의 용어입니다.

기독교의 타락과 부패를 방지하고 올바른 하나님의 백성(성도)과 공동체(교회)를 회복하려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고착된 의식적인 예배에 치중하지 말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과 진리의 생활예배가 이루어지도록 한 후에야 사도신경에 표현한대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공변된 공동체의 예배가 비로소 그 보람을 찾게 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특정교회를 소개함에 집착하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라는 복음전도에만 전념하므로
"교인이시군요" 라는 말보다 "예수를 믿으시는군요" 라는 말을 듣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도적인 교회에서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강조하는 교역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영과 진리’의 삶보다는, 즉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다운 삶보다는 예배의식을 우상화하는
예배지상주의적인 그릇된 신앙관입니다. 그런 까닭에 영과 진리의 예배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려할 때, 불신자들에게 교회를 소개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당연한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변질된 복음을 선포하는 바로 서지 못한 제도적 교회에서, 그가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자신이 제도적 교회의 부조리를 분별할 수 있을까? 실족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을 염려하시고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 15:14, 마 23:13-15)

그래서 제도적 교회를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변질된 복음을 전파한다면 교회를 먼저 보고 예수를 믿는 것보다, 예수를 먼저 보고 교회를 찾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영적 생활예배가 선행되어야 제도적 교회가 타락하고 직분자들의 부조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기복신앙이 아닌, 맹목적 신앙이 아닌, 확실한 신앙을 스스로 찾아서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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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는 기원전 2-6세기경으로 추정하는 중국의 대철인입니다.
그는‘도(道)’라는 것을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만물의 절대 지배자로 보는 세계관을 설(說)하고 있습니다.
그‘도’를 풀이함에 있어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말씀 도’자임으로‘로고스’를 대입해 보면
그의 사상에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도덕경 25장 말미에‘人法地하고 地法天하고 天法道하고 道法自然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땅위에 살고 있으므로 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하늘이 존재할 때, 땅은 그 구실을 할 수 있고,
하늘이 존재하는 것은 도가 있기 때문이며, 도의 본질은 자연이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으로는,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천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자존자(自存者, 야훼)라고 했습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산천초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스스로 그러한’의 의미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이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필자는 노자의 사상을 성경말씀에 꿰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우주관이나 인생관에서 동감할 수 있는 논리를 적용하여 제도적 교회의 모순을 밝혀보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위자연주의(無爲自然主義)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무욕(無慾), 청정(淸靜), 무위(無爲),
자연(自然)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최상의 생활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위적인‘유위(有爲)’의 행위가 많을수록 인간의 삶은
그 만큼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이와 같은 인생관은 그의 생존 당시의 사회상이 관권전횡과 권모술수로 백성의 인권이 유린되고 소시민의 소유가
약탈당해 인심은 극도로 악화되고 사회정의가 무너져 도의적 혼란이 극심한 시기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자는 사회적 부조리의 원인을 인위적인‘유위’의 정치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상적인 정치는 백성을 다스리는 법령을 복잡하고 다양하게 만들어 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존의 법령도 점차 줄여 가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법령은 인적, 물적 손실을 감당하게 되고
그로 인한 피해는 언제나 소시민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조작이나 기교에 의하는‘유위’는 백성을 고달프게 하여 생활고를 가중시키고,
한편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유위’를 지양하고‘무위’로서 자연적인 도리에 순응해 가는 것이 최상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도리를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할 때, 그 논리를 수긍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하고 주변의 이방들과 같이 왕과 방백들에 의한 제도적 왕의 정치를 요구한 것도
인본주의적인‘유위’를 선택한 것으로 그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로 나라 잃은 백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삼상 8:4-9, 호 13:11).
 
이러한‘유위’의 행위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오는 평강을 의심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의
제도적 권력에 의한 능력을 의지하여 평안한 삶을 보장받으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인 자연질서를 역행하는
인위적인 기교와 조작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의‘믿음’은 오직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믿음’을 위해 인간이 작위해야 할 노력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자= 은혜 받지 못한자,믿음을 간구하는 기도는 작위에 해당하지 않는지...)
 
인간의 정치사를 볼 때, 노자의‘무위자연’사상은 확실히 차원 높은 사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하는 세상에서는 한낱 이상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기독교 사회에서는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유익한 신본주의의 사상의 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회고해 볼 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타락하고 부패한 원인은 인본주의의‘유위’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서 주님이 분부하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제해야 할, 교회의 예배의식이 제도적 교회를 위한‘유위’의 예배의식으로
변화되어 온 까닭입니다.

제도적 교회의 예배의식은‘예배를 위한 예배’로‘유위’의 설교와 헌금이 예배의 중심이며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의 시설면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게 하기 위하여 강단장식과 예복 등에‘유위’의
정성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예배하는 교인은 성직자, 직분자, 평신도의 엄격한 제도적 구분이 성립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도로서의,‘만인 제사장’이라는 의미인 성도로서의 기도, 교제, 구제 행위 등은 예배의식의 형식적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첨가되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신실한 예배의식은 성도들의‘영과 진리의 예배적 삶’을 위한 합심기도와 교제에 초점을 맞추는 초대교회와 같은‘무위’의
의식이어야 합니다.(행2: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의식을 구실로 행해지고 있는 매매하는 자들을 보시고 그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으시며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마 21:12-13)

그리고 전도를 위하여 12제자를 각 지방으로 내어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마 10:5-10)

그런데 초대교회의 사도시대가 지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유위’의 전도와 예배로 변모되어 왔습니다.
세상을 두루 다니며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전도자들이  교회에 안주하여 초신자, 기신자, 직분자를 막론하고
모든 교인들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주일마다 회개, 구원, 십자가, 부활, 천국 등을 되풀이하는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무위’의 의식이 아니라 축복을 받기 위한‘유위’의 의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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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같이 목회자들은 세상을 향한 설교에 전념해야 하고
기신자나 직분자들은 기도와 봉사에 전념하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전도자들은 어떤 대가나 조건도 없이 원근간에 왕래가 가능한 모든 지역을 두루 다니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곧‘무위’의 전도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반대급부가 보장되거나
세상에 널리 명성을 떨칠 수 있는 복음화와 선교라는‘유위’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이름을 남기려는
종교인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하물며 전임 전도자들에게 대가를 위한‘유위’를 요구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사나 지체적 위상이 다를 수는 있으나 그것이 제도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성령의 역사에 따르는 믿음의 모임은 '에클레시아'라는 원어의 의미로서의‘무위’의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꾸밈없는 신실하고 경건하고 소박한, 그리고 동등한 위상의 지체적 성도로서의 모든 교회 의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예배의식은 성경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위한 기도와 구원의 기쁨과 감사,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의식이 주류를 이루어야 하며, 한 주간의 삶을 위하여 성령의 재충전을 위한 성도간의 위로와 권면의
뜨거운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와 헌금은 교회의 예배의식을 위한 중요한 몫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무위’의 성경말씀과 경건한 믿음과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유위’의 신학이니, 교리니, 교회법이니, 전통이니, 제도니,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교회를‘질’보다는‘양’으로 성장시키려 했기에‘유위’는 또 보다 낳은‘유위’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므로 대립과 분쟁은
심화되고 그에 따른 분파는 당연한 현상이며 기독교 이단의 속출은‘유위’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영과 진리의 예배는‘무위’의 예배이며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유위’의 예배임을
그리스도인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유위’의 교회와 교인의 세태를 염려하여 로마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적인 작위로 인한‘유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인‘무위’의 삶입니다.
 
+++++++++++++++++++++++++++++++++++++++++
정말 요즘 고민하고 있는 교인과 신도의 문제, 그리고 구복으로 왜곡된 신앙인의 모습에 대해 잘 정리된 설교문입니다.
다만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에 대해 아주 분명치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선택된 자들의 신앙으로 비춰지는 요한 계시록의 천국에 오르는 14만4천명의 내용이나
믿음을 입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상치되는 듯한 은혜로서의 믿음은
정말 기도에 대한 좌절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들'
어느 나라보다 유혹이 많은 이 나라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는 믿음에 의심의 싹을 틔우는 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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