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구약과 신약의 구분인 동시에 종교와 신앙의 구분이고 껍질과 알맹이의 구분이다.
구약의 율법으로 인해 참신앙의 모습이 왜곡된 것을 복음으로 바로 잡기 위해 예수라는 이름으로 창조주가
직접 인간 세상에서 살다간 역사의 기록이 신약이며, 또 바로잡아진 ‘약속’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로서 사도들의 삶이 제시되고 있으며, 정말 우리 삶의 끝이 어딘지에 대한 확신과
우리 삶이 어떤 의지의 충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우리 역사의 미래에 대해 우리가 선택할 바를 알려주기 위해
계시록이 신약 성경의 끝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주류는 율법이 아니오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 중심의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형을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 속에 소위 종교적 전통 혹은 교회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율법들을 우리는 흔히 본다.
연보를 상징하는 십일조가 재물 축복의 통로라고 함은 십자가의 복음에 반하는 율법주의의 주장이다.
율법의 십일조와 복음의 연보는 구분되어야 한다.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과(막
극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한 사례는(고후
바리새인과(눅
부자가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는 것은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하고도 가난한 자의
전재산과 맞먹을 수 있는 한달 벌이를 한다면 자신의 생활을 하는데 충분한 돈을 제외하고도 남은 돈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까닭이요 물질로 고통 받는 자들을 돕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십일조로는 천국이 불가능하지만 복음의 연보로는 천국이 가능한 것이다.
주일 마다 교회를 가는 문제도 이것을 안식일 지켜야 하는 율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의 안식일은 창조의 피로를 풀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창조 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여백을 두신 것이고,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삶의 근원을 생각하고, 창조된 목적을 생각하고, 창조주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시간을 갖도록 안배하신 모형이 바로 안식일이다.
그것이 일주일 마다 반복되어져야 한다는 강제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며,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 않고 다른 일을 하거나
놀러 간다거나 하는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죄악인양 설교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원치 않는 죄를 만들어 내는
율법인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그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가를 직접적인 행동과 말씀으로
보여 주신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그 안식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다.
안식은 말초적 유희와 쾌락이 아니라 숭고한 즐거움과 행복이며 생명 됨의 충전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와 기도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안식을 얻는 것이며 이웃과 더불어 서로에게 유익을 나누는 것이
바로 안식이다. 안식은 우리의 호흡처럼 우리가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든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목회자는 설교를 통하여 신약의 사도들의 삶보다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신앙생활의 모범을 찾아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삶보다는 선지자들의 삶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출세의 삶을 선호하는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므로 제도교회의 물적, 양적 부흥성장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모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구약의 선지자에게서, 말씀의 모델은 신약의 사도들에게서 찾아 설교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장수하면서 거부로 살았고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은 일국의 제왕으로,
총리로 성공을 이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 가르치지만 베드로, 바울, 요한, 야고보, 빌립, 스데반 같은
사도들과 제자들은 사회적 출세나 성공이 없이 오로지 고난만 당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순교에 이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삶의 모범을 애써 찾아 가르칠 그들 나름대로의 당위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한 어느 신앙인의 말은
정말 공감이 간다. 다름 아닌 교회 또는 성직자의 曲學阿世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성직자들의 설교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 신앙의 모습을 강조하기보다 기독교적 성공의 공식을 율법적인 포장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율법의 모순은 현재 우리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삶에 알곡에 섞인 가라지처럼 널려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보아도 율법의 모순이 현재에 존재한다. 구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유대교는
아직도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구약성경의 야훼 하나님을‘알라’신으로,
그리고 22명의 예언자를 도용하여 만든‘코란’을 경전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슬람교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라고 자부하면서
아직도 일부다처제라든가 호전성(好戰性)을 버리지 못하고 기독교를 적대시하며 세계 곳곳에서 인류의 평화와‘십자가의
복음’에 도전하고 있다. 혹은 구약의 호전적인 모습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침략과 자원 약탈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구약이 낡은 부대에 담긴 묵은 포도주라면 신약은 새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이다.
묵은 포도주가 있기에 새 포도주의 맛을 분별할 수 있고 낡은 부대가 있기에 새 부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크리스마스 같은 기독교 적인 행사의 전파가 아니라 인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내던진 예수와
복음의 전도가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협박이요 협박은 반감과 거부를 동반할 뿐이다. 예수의 삶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예수님이 실천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범을 보이려 노력해야 한다.그것이 진정한 예수 믿는 자의 복음 전도이다.
전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지만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구약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율법에 메이지 말자는 이야기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와 희망을 이야기 하지 않는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여 형식의 틀이 아닌 진정한 신앙 진정한 예배로 나아가는 모습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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