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 38-39]
이 구절을 두고 여러가지 생각을 해본다.
전후 사정으로 보면 죽음을 앞둔 사람 예수의 고뇌가 소름 돋도록 전해져 온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 그러나 자신의 사명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아야만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수라면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의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므로...
더우기 그의 그런 고뇌가 없다면 그의 죽음은 신의 장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많은 기적을 행하심을 통해 그 스스로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왜 죽음 앞에 고민하셨으며, 그 대속의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셨는가?
그것이 그의 소명이고 그래야만 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심지어 이를 제자들에게
알리기까지 하시지 않았는가?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
속죄양으로서의 사명 앞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구절로 기록되기에는 너무 장중하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의 의지를 주장하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시라는
순종을 이야기하기 위한다고 한다면 왜 나사로를 살리셨는가?
이는 아버지의 정하신 바를 어긴 아들이지 않은가?
혹은 그 기도의 순간에도 함께하지 못하는 소위 제자라고 칭하는 인간의 단점을 부각하기 위해?
오히려 그런 목적이라면 그 크라이 막스는 베드로의 3번 부인과 회개의 눈물이 더 극적이다.
너무 죽음이 두려워서? 사람이라면 그러하되 신의 아들로서는 말이 안된다.
그리고 이미 다시 사실 것을 아시지 않았는가?
인간이 신을 닮아 창조된 존재이므로 그 성정으로는 성경에서 신인(神人)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그 성경의 기록으로서는 인류의 선생이신지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구별이 어렵다.
왜 우리는 고난의 예수를 우리의 아픔과 동일시 하는 종교적 전통을 전승하는가?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아닌가?
소설 속의 인물인지 역사상의 기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지의 관우는 화타가 뼈를 깍는
수술을 하는 중에도 장기를 두고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화타로부터 절을
받았고 후대에는 유비 장비는 따라 갈 수 없을 정도의 인물로 심지어 중국인들에게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을 인간들은 초인적이라 표현하거나 신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신 예수에 대해서는 왜 그 고난과 고통을 초인적인 이미지로 대체하지 않았을까?
다니엘의 친구들을 풀무가운데서도 살리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왜 그러지 않았을까?
성경에 이 대목이 기록된 것이 정말 어떤 목적일까?
도마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