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8:1-3을 보면 시련을 당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기술되어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 고난의 목적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살아감을
알게하려함에 있다고 3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2장에서 또 나의 도마를 만난다. 그리고 고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 장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란 정의와 인간의 자유 의지 범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이 존재한다.
전지전능의 하나님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이미 아시는' 분이다.
이 장 역시 3장의 표현처럼 '알려 하심'이 아니라 '알게 하려하심'이 아닐까?
선악과 사건으로 사탄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이 밝히 보게 된다.
물론 불순종의 죄악과 그로 인한 인간의 고난과 책임이 함께 주어진다.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으로 주어지는 고난은 징벌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 신명기 2장의 고난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하는 수단적 의미이며
사랑의 매이다.
여호와가 주신 고난이 왜 이런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왜 최초의 선악과 사건에 대해 사람이 생각하는 용서와 회개가 아닌
하나님의 용서의 방법으로 삶의 고난이 주어진 것일까?
" 네 이웃의 잘못에 대해 일곱번의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메시지는
왜 창세기에는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는 형태의 용서와 사랑의 표현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 "밝히 봄"과 인간의 "자유 의지"는 묘한 상보적 관계와 상충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밝히 보지 못하면 죄를 보지 못하며 죄를 알지 못한다.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죄와 무관하며,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자유 의지의 극대 표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이둘은 상호 필요 충분 조건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밝히 봄'의 속성은 악을 보게 됨을 이야기한다.
선악과로 인해 인간이 처음 겪었던 것이 바로 수치심이다.
벗고 있어도 떳떳했던 것이 벗고 있으니 부끄럽다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사족을 달자면 둘은 부부 사이가 아니었던가?
이는 상대가 있음으로 해서 자기가 하고 있었던 것 조차도 더 이상은 할수 없게되는
자유 의지의 제약을 가져온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는 '밝히 봄'은 '자유의지'와 상호 충돌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의 고난은 밝히 보지 못함에서 발생한다.
문제를 제대로 알고 그 원인과 대안을 볼 수 있고,
또 본대로 행동한다면 인간의 고난은 지금 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난은 밝히 봄을 위한 연습이거나 그를 위한 상황적 조건의 부여인가?
'밝히 보게 된것'이 불순종의 죄의 결과임에도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그 밝히 보게 하는 것은,
물론 밝히 보는 대상이 하나는 하나님이고 하나는 죄악이지만 , 묘한 패러독스를 내포하고 있다.
시편 1장에서 처럼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복"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것 또한 신적인 메시지라기 보다는 사회적 산물의 메시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한할까?
아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무한이란 없다. 단지 그 경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의 소위 '제한된 자유의지'는 진정한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결론은
철학적인 사유의 결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 의지의 속성은 바로 그 제한됨 자체이다.
끊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도 그 끝을 알지 못해 '겁을 먹고' 생각을 접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가?
어쨌든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목적은 변화에 있다.
다만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 변화의 선택에 있으며, 대부분은 양자택일적인 선택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자유의지의 결과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생각해보라. 자유의지인가?
그리고 '도덕'이라는 것이 또한 우리의 자유 의지의 범위를 정해 준다.
타인의 자유 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의지란 것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자유 의지란 것이 '문자적인 자유로운 의지로서의 모습'이 손상되면서
그 모습이 분명해진다. 너희들끼리 또 나 여호와와 함께 더불어 사는 자유 의지로 말이다.
전지전능과 자유의지의 모순 같은 일치....
이런 것을 전지 전능의 트릭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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