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습(學習)에 대해]
우리는학습을 흔히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거나 하는 등등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학습의 의미는 배우고 익힘이다.
그런데 배움은 있고 익힘이 없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학원을 보낸다.
학원을 빠지려는 자녀는 나무라면서도 학교에서 배운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나무라는 부모는 드물다.
배움과 익힘을 분리한 것은 부모들인데 , 그 부모들이 나중에 그 자녀들이 대학을 나오고 사회에 나가 자립하고
돈을 벌고 해서 잘먹고 잘살면서도 부모를 섬기지 않는다면 섭섭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인 바로 그들의 책임임을 알아야한다.
배움을 익힘과 분리한 바로 그들의 책임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배움을 익힘과 연결시켜주라.
그것이 인격적 도야를 위한 공부요 학습이다.
많이 배워서 좋은 것이 아니라 적게 배우고 적게 알아도 실천할 수 있는 배움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배우고 익힐 것인가?
우리가 학교 교육에서 우등생과 열등생이 왜 생기는지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바로 아이들을 나이로 구분하고 그 나이에 공부해야할 분량과 수준을 정해 두었기 때문에 우열의 구분이 생긴다.
그런데 배움은 비움의 채움이다. 배움을 비운다는 것은 바로 익힘을 말하는 것이고 배움을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움은 나이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와 그 자녀들에게 비워진 것이 어느정도인지를 깨달고 발견해야만한다.
그에 따라 채움의 크기도 달라진다.
비움이 크면 채움도 큰법이다.
그러나 이런 비움의 원리를 섣불리 아이들에게 적용하지 마라.
아이들은 비어있음이지 비움이 아니다. 그래서 비움의 원리 부터 가르쳐야한다.
공부해서 남을 주는 이유를 먼저 가르쳐야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비움을 인식하지 않으면 그 채움의 공간은 없다.
그래서 공부를 왜 해야하는 지에 대한 목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공부해야할 분량과 수준을 스스로 깨닫고 채워나가도록 도와야한다.
말로는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지만
정작 부모인 우리는 아무런 근거 없이 학교의 열등생들에게 사회적인 경쟁력이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전제를 가지고는 독립적인 인간 존재로서 자식이 성장하기를 바라지 말아야한다.
배움을 익힘은 배운 바를 따름을 의미한다.
배운바를 따름으로서 우리는 배움을 내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내 것으로 된 그 배움 바를 통해 우리의 인격의 틀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인격은 우리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다.
때문에 배움이 일과성으로 끝나지 않듯이 익힘역시 일과성이 아니라 반복적인 것이다.
반복을 통해 배움과 익힘과 비움의 깊이가 더 깊어지는 것이다.
음식의 맛을 더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음식 자체를 묵혀서 먹거나 익혀서 먹는다. 배움의 익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날음식을 탈없이 더잘 소화하기 위해 익히는 것 처럼 배운바를 익힘은 자기에게 맞는 모양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또한 배움에 배움을 더해가면서 그 배운바를 익혀감은 우리가 묵은 김치를 통해 처음 배추가 가질수 없는
독특하고 고유한 맛을 내게 하는 것처럼 묵은 지식이 독특한 새로움을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古典)은 정말 묵은 김치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도 단지 책을 읽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책에서 제시하는 바를 실천해보면
더 많은 배움을 얻는 것 처럼,
배운것을 익히는 과정을 통해 단지 앎이 아닌 삶의 지식을 만들어 가야하며,
삶은 항상 행함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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