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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읽기

아저씨돌과 초식남

 

[한겨레21]

[특집2] 가부장적 중압에서 벗어나 망가짐까지도 솔직히 보여주며 어울릴 줄 아는 '귀여운 아저씨'
지난해 말부터 유행한 '아저씨돌'(아저씨+아이돌)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2009년 연예 프로그램 최고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김태원을 비롯해, 왕년의 스타 최양락, 김국진, 윤종신 등 40대 아저씨들의 활약이 아이돌 스타 부럽지 않을 정도다.

TV에서 '아저씨돌'이 성가를 올리고 있다면 TV 밖의 대세는 '초식남'이다. 초식남이란 육식성, 그러니까 공격성이나 적극성 같은 고전적인 '남성성'이 거세된 남자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 한겨레 > ESC 섹션 상담란에 문을 두드리는 고민 가운데 상당수가 가깝게 지내면서도 도통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는 초식남 때문에 속 타는 여성들의 하소연이다. 물론 초식남의 99%는 20~30대다.

따지고 보면 아저씨돌의 유행과 초식남 현상은 무관하지 않다. 아저씨돌은 아이돌처럼 멋지지 않다. 말 그대로 '아저씨스러운' 외모를 숨기지 않으며 '아저씨 같은' 이야기들을 한다. 초식남들은 여성 시청자와 함께 이 아저씨들을 보면서 웃는다. 이들에게서 자신의 10년 뒤, 20년 뒤를 본다면 편하게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인종 같은, 나이가 들더라도 결코 닮을 것 같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에, 타자화할 수 있기 때문에 맘 편히 웃는다. 결국 40대 남성들은 여성이나 어린아이뿐 아니라 자신보다 고작 몇 년 젊은 남성들에게도 놀림받는 측은한 종족인 셈이다.

하여 지금의 아저씨가 가장 불쌍한 존재로 전락했는가 하면,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언제 아저씨가 생활에 찌든 불쌍한 가장이 아닌 적 있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연공서열과 정년제가 사라지면서 이미 아저씨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충분히 불쌍한 존재가 됐다. 흥미로운 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저씨의 자리는 똑같이 위태롭고 측은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아저씨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면받는 것이 아니라 놀림받는 '아저씨돌'은 변하는 아저씨상을 보여주는 대중문화의 지표다.

대표적인 아저씨 예능 프로인 한국방송의 < 해피 선데이-남자의 자격 > 에 출연하는 이경규와 김태원이 좋은 예다. 이경규가 사사건건 군림해야 직성이 풀리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버럭' 하는 가부장 스타일이라면 김태원은 게으르며 능력도 의욕도 없는, 밀려난 40대의 이미지다. 판이한 성격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한민국 40대 가장의 전형적인 면모다. 물론 설정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성격상 상당 부분은 두 사람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건 솔직한 모습 그 자체가 아니라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의 태도, 또는 제작진의 의도다. 가부장적 태도는 가부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한마디로 '비호감'이다. 그런데 이경규는 이런 걸 태연히 보여준다. 시청자들을 짜증나게 하기 위해서? 물론 아니다. 이제는 이런 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태도보다 본인에게는 더 창피스러울, 실패자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김태원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강압적으로 명령하거나 그저 자기 모습을 숨김으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외면받는 것보다는 놀림받는 것이 덜 외로운 일이라는 걸 아저씨들이 체득한 것이다. 이제는 '귀여운 아저씨'라는 부조화한 단어의 조합조차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 40대 남성이여, 소외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솔직해지기를 두려워 말길. 솔직한 아저씨는 고전 영화 주인공처럼 멋있지는 않지만 피하고 싶은 존재는 결코 아니니까 말이다.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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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남, 거세된 남성성, 가부장을 주장하면 웃기는 사람이 된다?
지금 40대들은 위의 내용을 공감할 사람들도 다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40대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환경에서 성장을 했다.
하나 덧붙인다면 경제 성장을 핑게로 가정에 무관심한 가장이어야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환경도 있다. 그 중에 엄마 치마바람 좀 맞은 친구들은

복에 겨운 것이었고...

지금의 아이들을 보면 여자아이들이 드세지고 남자아이들은 여성스럽다.
거세된 아이들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가부장과 거세된 아이 사이에서 현재 40대들의 정체성은 무엇이어야햇을까?
스스로 변신하기에도 버거운 그런 세월을 살아왔다.
나름 투사로서 이 나라의민주화에 공헌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독재와권위와 억압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민주화는 찾았을지언정
권력의 비호아래 성장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노동자 운동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한 때는 이 나라 판도를 좌지우지할만 했던 "40대 기수론"조차 더 이상

현 사회의 40대들에게는 기대어 볼만한 논조가 되지 못한다.

이유는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이 나라가 기득권층과 나머지 서민층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은 7살박이도 거대기업의 대주주가 되어있다.
10대에서 7~80대도 가리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서민층은 그 중심에 서야할 40대 마저도 무기력하다.
60대 정년퇴임이 50대로 그리고 40대 정리해고로 이어진다.
정리해고가 싫어 뛰쳐나와 경제적 기득권을 얻겠다고 발부둥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금 내가 아는 40대 백수들 중에서 그들의 화려한 30대를 향수하는 친구들이 많다.

가부장들이 마련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고도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횡재를 한 친구들도 많았고, 그들의 가부장이 평생 걸려 받게된 월급 수준을 

불과 10년도 안되어 맏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니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열심히

살았던 가부장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저 잘난 줄 알고 이리 저리 날뛰다가 꼴이

어려워진 40대도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기업에서의 40대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외국계 회사의 대표나 임원들 중 80%이상이 40대다.
그들의 장점은 과거의 어려움을 이겨낸 경험과 미래 비전의 설계능력이다.
그리고 그들은 브릿지다. 교량이 교량 역할을 못하면 결국 단절이 일어난다.

40대여 그대들은 초식남이 아니다. 초식남의 아버지들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가부장도 아니다.
그대들의 가부장들이 담고 있던 전통 윤리의 마지막을 전수받은 위대한 아들들이다.

우리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브릿지오버 트라블드 워터를 읊조리며 자랐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을 말해주는 주제곡이다.
스스로 빛나라.

모든이의 벗이되어 그들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다리가 되고 기둥이되라.
더불고 나누라! 그것만이 우리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길이다.
우린 가족을 위해 사는 세대가 아닌 가족과 함께 사는 세대,
이웃과 경쟁하는 세대가 아닌 이웃과 너불고 나누는 세대로 거듭나야만 산다.

40대여, 각성하라!

니가 변하고, 가족을 변화시키고 ,변화한 이웃끼리 뭉쳐 놀아라!

그래서 우리의 초식남들이 "그들은 진정한 새 시대의 새 기수였다"는 증언을 남기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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