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굶주림 ] 크누트 함순
중간 중간 일이 생겨 끝까지 읽지 못한 소설이라 끝장을 볼 요량으로 잡았다.
그리고 끝장을 냈다. 허기가 진다. 저녁을 먹지 않은 탓인가 보다.
<대지의 축복>이란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 그가 31세의
약관의 나이에 쓴 <굶주림>은 1인칭 화법(독백에 가까움)의 호흡이 긴 소설이다.
4개의 chapter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나눔이 크게 의미가 없을 뿐더러 크게 눈에 띠는
사건도 없이 작가인 소설 속 주인공의 굶주림을 모티브로 그의 일상과 독백들로 대부분의
내용이 채워지고 있기 때문에 호흡이 길게 가져가야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또한 어떤 독백은
그의 현실 대안적 공상으로 채워져 있는데 페이지 하나를 훌쩍 넘기기가 일쑤이고,
또 특정 시점을 서술적으로 상세하고도 길게 그리고 그에 대한 주인공의 해석마저도 길게 풀어져
있기 때문에 눈으로 쉼표를 찍기가 만만찮다.
내용의 대강은 궁색해진 작가가 굶주림이란 문제에 부딪혀 대응하는 여러 상황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육체적 굶주림에서 출발하여 불거지는 자기 정체성 문제라든지, 도덕성 , 신앙 ,그리고
여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세 들어 살던 집에서 방세를 못내 쫓겨나게 되고, 가진 것을
저당 잡혀 허기를 면해보지만 얼마 가지 않아 돈이 다 떨어지게 되고 글값으로 받은 돈으로
또 잠시 허기를 면하고는 돈이 떨어지면 다시 굶주림 속에서 음식을 얻기 위해 배회하는 주인공의 행동들이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이 구걸로 배고픔을 해결하는 거지를 부러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스스로 작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고 , 머리를 짜내
글을 쓰는 창조적 인물이라는 스스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설정이 남이 보지 않는 데서는
톱밥을 씹고 , 개를 주기 위해 필요하다는 핑계로 얻은 고기 뼈다귀를 뜯을지언정 남한테 음식을
직접 구걸하지 못하게 한다. 주인공은 돈을 얻지만 아마도 구걸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소설의 결말에서 배에서 일자리를 얻어 외국으로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주인공이
굶주림의 순환 고리를 끊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배고 고프다는 신호는 살고 싶다는 육체의 본능적 신호이다.
이런 신호에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허기라고 표현한다.
심지어 인간은 배가 불러도 허기를 느낀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굶주림은 그 허기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식습관을 파괴하고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수준 정도의 배고픈 경험이다. 그리고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누구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칠 것이다.무엇이든 먹을 것이고 먹기 위해서,
혹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려 할 것이다. 주인공은 작가로서 인정받지도 못하지만
그의 자의식은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소위 체면을 버리는 행동을 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걸린다. 일자리를 구하려 하고 글을 신문사에 기고해서 그 원고료로 먹는 것을
해결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횡재수로 얻은 돈은 도덕적 양심 혹은 자존심을 위해 남에게
줘버리거나 밀린 방세 보다 과하게 지불하고 나서 후회를 일삼기도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굶주림으로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걷기(배회하기)와 ‘헛소리’이다. ‘
헛소리는 현실 대안적 공상이거나 거짓말이거나 그저 남들이 물어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자신을 대변해 보려 꾸며대는 소리들 말이다. 이런 헛소리의 상대들 조차 소설에서는
신을 제외하고는 고정 출연이 없다. 걷기는 굶주린 상황에서 주인공이 하는 기회 찾기의 ‘
노력이다. 우선은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기회를 찾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헛소리를 할
기회를 찾기 위함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공부도 좀 했고 힘깨나 쓸 수 있을 만한 주먹도
가졌기 때문에 굶주림은 자기 연민보다는 자기 부정적은 노력을 더 많이 하게 한다.
“ 이런 내가 왜 굶어야 하며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가 그의 가슴 속에 담긴 질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기 부정이 끝에 붙어 있는 죽음이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주인공은
교묘하게 자신을 한 번 더 부정하기도 한다. 바로 배가 고파서 생각이 안 된다는 논리다.
배가 고파서 제대로 된 글을 쓸 수가 없다는 자기 위안의 논리는, 소설 후반부에서 신보다
더 가까운 구원자이고 스스로 복종하는 ‘대장’ 신문사 편집장의 적선으로 구하게 된 하숙집에서
배를 곯지 않는 상황에서도 글을 쓸 수 없는 것이 이상하다는 표현으로 자기 능력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배가 고파도 사랑은 할 수 있다. 그는 배가 고픈 만큼 사람들의 인정이 고프고
사회적 출세가 고프고, 여인의 사랑이 고픈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대부분의 것들을 토해낸다. 음식을 토해내고, 원고라는 이름 하에 정리 안 되는
생각을 글이라는 건더기로 토해내고, 뇌를 짜서 거짓말과 공상을 토해낸다 이런 토악질은
소설의 중 후반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내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합리화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주인공은 세상을 강단 있게 살기에는 부적격한 인물로서 내게 남는다. 또한 세상에 대한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의 이면에 숨은 걱정, 혹은 애써 숨기고 사는 두려움이 드러난 것 같아 동일시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인물이다.
이 소설을 읽는 중간에 <똥파리>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 없는 대사가 없는 영화였지만 그 욕 때문에 영화의 의미가 남달랐고
이상적 현실과 현재적 현실간의 괴리를 욕과 폭력으로 해소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배고 고픈
굶주림 이상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표현하고 있었다. 욕으로도 정을 나눌 수 있는 묘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영화. 인간은 배가 고파도 미치지만 정이 고파도 미친다. 그리고 머리에 좀 든 게
있다면 배고파서 미치는 것을 견뎌보기는 한다. 그러나 정승도 사흘 굶으면 도둑질한다는 속담도
있듯 굶은 개가 언 똥을 나무라지 않는 법이다. 결국 배고파 미치는 것은 먹는 것이 약이다.
그리고 약발도 금방 받는다. 그러나 정에 고파 미치는 것은 정을 먹어 봐야 잘 먹지도 못한다.
토해내기 일쑤다. 약발이 받으려면 한참 걸린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정에 고픈 사람도 정을
퍼 준다는 것이다. 퍼주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줘도 받지 못하면 허기가 더한 것이 정이다.
그런데 굶지 않고 채워도 채워도 허기가 지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은 접두사처럼 쓰이면 조금 나은 편이나 접미사처럼 쓰이면, 한계를 가진 인간임에도
스스로 그 한계를 무장해제해버리고 브레이크를 부숴버린다.
돈에 대한 욕망,사랑에 대한 욕망,권력에 대한 욕망… 그것에 브레이크를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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