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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인간이란 무엇인가- 빅터 프랭클 지음-

 

[ 인간이란 무엇인가] 빅터 프랭클 지음/김재현 옮김/서문당.1973.

 

이 책의 원제는 < Man’s Search for Meaning> ‘의미에 대한 인간의 탐구 혹은 노력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제목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번역된 이유는 역자 나름의 고민이

있어 보인다. ‘인간의 의미에 대한 탐구로 번역하거나’’의미에 대한 인간() 탐구로 번역할 경우

인간의 의미에 대한 탐구이거나 의미에 대한 인간 탐구가 되어 버려 약간 다른 뉘앙스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크게 보아서는 이 책은 인간의 의미에 대한 탐구 혹은 인간 탐구 결과

의미가 가지는 중요성 등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틀릴 것은 없다. 그러나 정작 저자가

의도한 주제는 인간의 의미에 대한 탐구로 방점이 찍혀질 것이다. 사실 그가 이 책의 전반부에

기술된 수용소 경험담은 인간의 의미에 대한 추구라고 봐야 할 것이나 후반부의 로고테라피를

기술한 부분은 의미 탐구에 가깝다. 그래서 다소 뭉뚱거리기는 했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

제목을 딴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번역이 오래고 심리학적인 용어가 인구에 대중적으로

회자되던 시절이 아니라서 지금에 와서는 번역이 다소 거친 감이 있다. 그래서 이시형 박사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으로 번역함으로써 저자가 겪은 상황적 서술을 정확히 하여 본래

저자가 의도한 바를 독자가 스스로 발견하게 하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정신의학자가

번역한 것이라 그런지 문맥이나 용어가 매끄럽게 느껴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번역한

역자 김재현씨는 로고테라피를 논리요법으로 번역하였지만 여기에 사용된 로고는 로고스(logos)

의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진리 혹은 진정한 의미를 뜻하기 때문에 논리보다는 의미에 방점이

주어져야 하는데  논리 요법이란 번역에서는 의미라는 의미가 약하거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는 굳이 번역을 했어야 될지도 모르지만 그냥 로고테라피로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된 요즘이다.

 

이 책은 전반의 수용소 생활의 기록 부분과 이 경험을 토대로 저자가 창안한 로고테라피에 대한

이론적 서술이 있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의 서술 부분도 수용소 생활에 대한 사실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수용소 생활을 통한 자신의 경험과 다른 포로들의 심리적인 변화를 학자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체험 수기 부분의 서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수용소의 일상생활이 일반 포로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일상 생활이라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수용소

의 일상생활은 자유의 박탈이나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일어

나는 일상적인 반복이 바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의 선택과 관련되는 혹독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의 체험자로서 그 체험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 목적으로 이 책을 기술하였다.

그리하여 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그들의 체험을 비추어 보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이해의 마음을 갖게 하려 한다.

 

저자는 우선 수용소 생활을 통해 나타나는 포로들의 정신적인 반응을 3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입소직후,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진 시기,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의 시기이다.

입소 전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은 이 환란에서 예외가 될 것이라는 집행유예의 환상을 가지고

있고 이 환상은 임소 후 급격히 무너지면서 괴이한 역설적 유머 감각으로 변화하고 이와 함께

호기심의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저자는 소름 끼치는 이런 호기심 체험을 냉혹한 호기심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인생을 박탈당했다는 충격의 반작용이라고 보여진다. 저자는 이 단계를

1단계로 보았다. 다음의 제2 단계는 이러한 충격에 대한 무감각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정서적 자멸에 이른 단계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서적 자멸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용하여 생명 보존에 집중하는 노력이 가능하게 한다. 바로 수용소 생황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다음 단계가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의 시기인데 저자는 수용소에서의 해방이 기쁨이라는 감정

으로 찾아오지 못하는 이런 포로들의 심리를 비인격화라는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 현실 감각의 상실이다. 현실이 현실로 믿어지지 안고 모든 것이 꿈과 같이 비현실로

보이는 것이다. 그들이 수용소 생활을 통해 수 없이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되었음에도 그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반인륜적 상황에서의 인간성 상실의 경험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저 짐작할 정도이지만 그 심각성만은 공감이

간다. 그리고 저자가 수용소 기술 부분의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이런 상황을 겪은 자들은 자신이

믿는 신 외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포로들의 심리적인 변화에 대한 기술과 아울러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포로들의

생존과 그들 자아와의 관계를 책임이라는 단어로 연결하고 있다. 라틴어 <finis>가 끝이라는 뜻과

목표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인간은 잠정적인 생존의 끝이 언제일지 모르면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사는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의 방법은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라고 한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왜 사느냐?” 는 물음에

목표와 의미가 부여된다면 인간은 어떤 상황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저자는 자기의 인생에 아무런 의의도 목적도 없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갈 의지를 잃은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인생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며, 그것은 우리가 인생에 대한

기대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지를 물으라고 한다.

다소 역설적인 이 방법은 로고테라피에 있어 역설적 의도라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여하튼 빅터 프랭클은 이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메시지를 말한다, 사람은 어떠한 최악의 조건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그리고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 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한다.즉, 나치의 수용소에 조차도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 처하였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선택'의 기준은 바로,  '삶의 이유' '삶의 의미' 인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비밀과

그 본보기가 되어준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에 핑계를 대거나 우연한

기회에 기대를 거는 삶이 아닌, 운명 앞에서 잔꾀를 부리기 보다는 삶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격려한 사람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시력 약해진 사람들이나 삶의 고통들로 인해 자신의 가치에 대해

시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눈을 뜨게 해준 인생의 안과의사라 평하고 싶다.

 

2 : 로고테라피

 

빅터 프랭클은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와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그런 그가 수용소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은 로고테라피라는 독창적인 심리 치료 이론을 창시하게 했다.

 

로고 테라피는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무의식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초점을 투고 있는

로이트의 방식이 아니라 상처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여 치유하는 방식이다. 현재는 심리치료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실존치료라는 심리학의 한 이론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대중 속의 소외’ 때문이거나

지나치게 다양화되고 개인화되고 경쟁의 도구로 전락한 듯한 요즘의 세태에서 한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에 관한 실존 문제에 봉착한 많은 사람들에게 로고테라피의 이론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로고테라피는 자기 존재의 밑바탕에서 갈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자기 삶에 있어 자신의 책임의식을 충분히 깨우쳐 주는 것을 통해 자신 있는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로고테라피의 핵심주제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 순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 마음, 영혼의 3가지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의미를 찾는 동안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삶의 의미는 늘 변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이것이 바로 로고테라피의

중심 명제이다. 삶은 항상 부정적인 문제들이나 상황에 노출되기 마련이지만 그것의 참 의미를 발견

한다면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로고테라피의 관점에서는 삶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 하더라도 행복이란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얻어지는 부수적인 현상이라고까지 말한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두 번째, 무엇을 경험하거나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세 번째, 회피할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취하게 되는 태도에 의해서이다.
이 중에서 로고테라피는 고통의 의미 부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때문에 로고테라피의 임상적 적용의 실제는 고통이 지닌 인간론적인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응 억제역설 의도라고 불리는 로고테라피의 테크닉은 모두가 인간 존재의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 즉 자기를 초월하고 자기를 이탈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로고테라피는 고통 받고 있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추며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가지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로고테라피의 이론적 기술 부분에서 보여주는 빅터 프랭클의 삶과 인생에 관한 철학은 약간 다른'

측면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초월적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질문과 답을 한 번 보자.

 

그럼 인간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여러분들은 인간 세계를 우주 진화 과정에서 종착점이라 믿고

있습니까? 아직 또 하나의 차원인 인간 세계 자 너머 세계가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없습니까?

인간의 괴로움의 궁극적인 의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발견되는 그러한 세계 말입니다

이 궁극적인 의의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유한한 지적 능력을 초월한다….오히려 인생의 절대적인

의의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논리보다 깊다

 

이 문장만을 몇 번이고 되씹다 보면 기독교의 조건 없는 믿음에 대한 설교의 한 대목을 듣는 듯하다.

이런 느낌은 책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우리 생존의 무상함이란 결코 우리의 생존을 무의미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내세로 인해 현세를 부정하지 말라는 설교를 듣는 것 같고, 범결정

론을인간이 주어진 조건에 대하여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무시해버리는 인간관이라

비판한 부분은 기독교의 자유의지 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처럼 들린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인간에 대한 기본 가정과 삶의 고통의 의미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며 그 과정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만들어지지(완성되어지지)않은 존재로 태어나 죽기 전까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형성해가는 그런 존재다.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학문에서 각자의 입장을 말해왔다.

신경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그러나 철학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의 존재로서 존재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고인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우발적 진화의 산물이고 문화인류학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상징의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들 모두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결과라는 것을.

 

이런 각각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삶에 대한 정의를 달리하게 한다. 인간의 생활의 양태를 생존의

양태로 바꾸는가 하면 인간 정신의 오류조차 진화의 과정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의미를 묻는다면 삶의 의미는 흡사 인간이 아닌 종족이 인간의 삶의 의미를 말한 것 같은 답을 제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누가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학문을 하는 학자

일지라도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의미 찾기의미 부여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존적 존재로서 우리는 의미와 무관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가 객관적인 성격을

띤다고 해서 그 의미의 주도권이 삶의 외부적인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인간이

지닌 자유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근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의 의미와 삶의 의미에 대한 주도권

을 인간의 내부, 즉 인간 정신에 두게 하는 것이다.

 

칸트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묻고,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를 물은 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인간은 선택할 수 있으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존재이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에 따라 그 삶의 의미가 달라지는 존재라고 답을 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빅터 프랭클에게 깊이 공감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으로

빠뜨리는 것은 실은 어떤 사람이나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또 그 상황에

대해  어떤 반응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으며,그 선택은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싶은지,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내가 꾸는 꿈은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내가 겪는 삶이 괴롭고 힘들다면,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 삶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내 삶의 '이유'를 찾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어떠한 최악의 조건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는 말이 이명처럼 울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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