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케로의 의무론에 대한 Self Q&A]
Q1. 이 편지 글을 아들이 읽고 이해했을까?
A1. 어쨌던 이런 관심과 부성애가 자식을 성공시켰다고 볼 수 있다.
Q2. 이런 류의 <말따먹기> 혹은 <생각따먹기>가 주는 유익이 무엇일까?
A2. 관념을 정교화함으로써 행동의 신중을 기하고 정의와 진리에 부합된 삶의 자세를
갖추게 했을 것.
Q3. 이 책이 서양 도덕론의 근간이 될 정도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애독
했다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
A3. 아마도 이 책에는 대의가 있기 때문. 그 대의는 바로 선을 추구하는 것이며 개인적
선을 위한 여러 지침들이나 공익적 선을 위한 정의 추구 등 시대를 통해 변하지 않는
인간 사회의 유익한 원칙 들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
그리고 이 책에는 곳곳에 삶의 잠언들, 즉 곱씹어 생각해볼 문장이 많다는 것이다.
정치 사회 경제 분야에 있어 오늘날에도 통찰적 각성을 주는 명문장이 많다.
Q4. 이 책은 구조화된 지혜인가? 아니면 지혜의 파편들이 포장된 문장의 집합인가?
A4. 주제와 일관성의 측면에서 보면 잘 구조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본인의 경험에 대한 객관적 추론이나 파나티우스의 책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통해 주견을 확대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주제는 그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당시는 구조화된 지혜로
볼 수 있는 것들도 시대를 따라 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측면들도 있으므로 해서
자연스레 하나의 파편이 되어간 것도 있는 듯하다. 노예나 재산권에 대한 생각 등은
현대의 인본적 준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인권을
최고선의 범주에서 생각했었다면 노예에 대해 달리 생각했을 것이다.
Q5. 이런 류의 서양 고전과 동양의 고전의 차이는 무엇일까?
A5. 성경은 예수가 기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논어나 맹자류도 저자가 직접 기술한
것이 아니다. 저자가 직접 기술하지 않은 것은 그 교단(혹은 학단)이 분파되고 유지
되면서 훈고학적인 성향을 띠거나 전혀 다른 성향을 띠기도 하여, 그 본의가 와전
되거나 후대의 제자가 한 시대를 영합하면서 왜곡되는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논어는 있으되 공자는 왜곡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키케로의 책은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지므로 후대의 분칠이나 폄하가 없다는 점에서 본인의 사상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으며, 해석적 오류가 적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본다.
Q6. 이 책을 통해 받은 가장 큰 느낌은?
A6. 인간의 정신 세계는 확실히 과학과 기술 발전에 비해 지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 2000년도 이전에 살았던 한 인간이 도달한 이러한 정신 세계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죽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보면 삶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해서 자신의 지성을 등한시 하는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사는 지 깨닫게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한 개인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질과 양이 한 인간이 고양해낼 수
있는 지적 수준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의 편재나
내용으로 보아 키케로가 그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졌다기 보다는 잘 훈련된
웅변가요 정치가요 철학자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의 곳곳에서 확인
할수 있는 그의 재기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만도 그의 자본주의자
이면서 복지론적인 입장을 확인할 수 있고, 공리 주의자면서도 개인의 권리를 중시
하는 균형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법치주의에 기반한 원칙론자이면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유용하다. 그러면 최고선은 최고 도덕적인 것이며 최고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도덕이 인간이 지니는 사회적 덕목에 대한 명시적 개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최고선 역시 사회적 산물의 범주를 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키케로는 호네스툼의 이데아보다는 데코롬의 이데아에 초점을 두지 않았을
까?
아마 키케로가 호네스툼 쪽으로 더 갔다면 이 책은 성경의 레위기나 신명기의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신을 언급을 하지만 무신론자로 짐작되는 키케로에게는 자가
당착적 모순의 늪에 빠지는 일이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Q7. 선과 악이 유용성이란 가치 기준으로 인해 그 한계를 모호하게 된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도덕적 최고선이란 어떤 모습이 될까요?
A7. 최고선은 인간 정신의 지향점일진데 그것이 시대를 통해 변화해서는 안 된다.
키케로의 정의와 그 의무에 대한 이 기록은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가의 자비와
더불어 사회적 삶을 통해 삶을 완성해 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어떤 불변의
원칙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사회적 산물로서의 최고선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앙금이 남는다 그러면 우리의 지향점은 과거의 최고선을 현재 혹은
미래 예지력을 통해 재조명하고 그것을 시대에 맞게 취사 선택하는 것으로 도덕적
최고선을 다루어야 하는 무모함을 감 수 할 수 밖에 없을까? 짧은 공부가 원망이다.
Q8. 나는 어떻게 살아오도록 강요되어왔으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선의 지향성 차원에서)
A9. 나의 선과 정의에 대한 관념은 그 자체로 각인된 것이라기 보다는 악과 불의에 대한
분노, 혹은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상대적
개념이다.
이 책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카테콘>적이고 <데코룸>적이다. 여기에는 선택이란
의지가 개입한다. 나는 절대선에 대해서는 관념적인 회의가 많다. 따라서 앞으로도
선택이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데코룸할 수 있는 선한 의지에 대해서 더 많이 고민
할 것이다.
** 나는 평소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누가 봐도 착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위해나 손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착한 사람이란 평판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내가 경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부모로서 자식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한다.
삶에 대해 가르칠 것이 없는 부모는 어쩌면 자신과 자식 모두에게 불행한 사람일수도
있다. 그리고 한 줄의 경구로 남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편지 형식으로 남기는 것도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이유는 이 책의 말미에 적었듯이 도처에서 아비의 음성을 자식이
듣는다면, 그의 생사와는 상관없이 그 목소리는 울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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