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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오래된 미래

 

[ 오래된 미래 유감 ]


1. <오래된 미래>의 아이러니.


<오래된 미래>라는 책은 꽤 오래 전에 세상에 알려졌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 서구인들이 가지는 느낌과 한국인이 가지는 느낌은

많이 다를 것이다. 서구인들의 눈에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이 생소하거나 충격적일 수도

있겠으나 한국인에게는 이 책의 내용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재도 진행 중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리 생소해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가 라다크에 머무르기 시작한 1975년의 한국 역시 경제 개발 계획의 기치 아래

도로가 놓여지고 도시가 발달하고, 월남 파병에서 돌아온 장병들이 그곳에서 마련한 밑천을

가지고 이런 저런 중소 기업을 시작할 무렵이고 중동의 건설 붐이 많은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던 즈음이다. 그 때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도 모호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나면 바로

농촌이었을 뿐 아니라 도시의 빈터에는 텃밭이 있고 농경지가 있었던 터라 농촌의 풍경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한국의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애매한 것은 매일반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나 도시 같다. 도시적인 상징인 편의점은 시골에도 있고 아파트 역시 논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떠억 하니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과거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런 패러독스적인

풍경이 지금은 더 이상 패러독스가 아닌 것이 된 <가까운 과거의 아이러니> 단적인 예이다.


여하튼 1975년 무렵의 한국의 도시민들은 대부분 출신이 농촌이었기에 그들의 정서는 도시적

이라기 보다는 농촌적이었다. 그래서 잘살아보세라는 청소차의 아침 방송을 통해 각인된 모토

보다는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모토가 가슴에 유전자처럼 박혀 있을 때다.

그래서 도시에도 이웃 사촌이 있었고 동네의 이목이란 것을 신경쓰는 사람들이 살던 때였다.

그리고 넝마주이라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 때였고, 고물상이 아이들 용돈도 가끔 주던 때였고

몸땅 연필을 쓰는 것이 착한 어린이였고, 연필로 쓴 노트에 빨간 볼펜으로 연습장을 했었고

다시 그 위에 까만 볼펜으로 단어 쓰기 연습을 하고, 그런 다음에야 폐지 수집 때 자랑스럽게

선생님 앞에 내려 놓으면서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 받을 수 있는 때였다. 그리고 똥지게꾼도

있었고 남자 화장실에 흰색 플라스틱 통을 두고 소변을 모아서 어디론가 가져가던 때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개발에 따른 문제 이전의 오래된 미래를 근검과 절약의 미덕과 자원의

재활용 그리고 이웃과의 소통과 공동체 의식이라고 한다면 그 <오래된 미래>는 우리에게는

아주 아까운 과거이다. 또한 개발과 도시화에 따른 소외와 양극화의 문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도시적인 것에 매우 길들여져 있어 이러한 문제들을 이미 한번 치른 홍역

처럼 이제는 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듯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가까운 과거 조차 망각한

<집단 건망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말이 나왔으니 <집단 건망증>을 한 번 생각해보자. 우선 이 병은 매우 전염성이 높다. 그리고

병증이 깊어지면 <오래된 미래>를 <새로운 과거>로 만드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역사왜곡 증상을 보이는 일본이고 동북공정 증상을 보이는 중국이다. 그들은 알고도 모른다.

이 병은 <오래된 미래>에서 밖에 약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다행이 한국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개구리 수준의 증상을 보이고 있어 희망은 있다. 또한 이 <집단 건망증>에 면역력을

가진 <오래된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다. 이들은 라다크의 사례를 오랜 전

홍역을 치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익숙하기에 놓치기 쉬운 것들을

라다크의 사례를 통해 한국인 특유의 <오래된 미래>를 살려낸다. 그것은 다름아닌 지금은

<무관심>이란 옷을 입고 있는 <남의 일 간섭하기> 이다.


이 <남의 일 간섭하기>는 아주 건강한 우리의 <오래된 미래>인데 이것이 살아있을 때에는

길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피워 물고 거리를 활보하는 녀석들도 없었고, 독거를

하더라도 돌아가신 후 한달 이상 방치되어 발견되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나는 일도

없었다. 이런 건강한 장점을 살려 라다크의 일을 꼬치꼬치 들어 간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는 것이 쉽게 이루질 수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2. <오래된 미래> 그 반론의 여지들


사실 이 책을 읽은 후 처음 생각은 서양인에게 이색적이고 문화적인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라다크의 사례들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많이 기억하는 편인 나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라서

그네들도 우리처럼 그렇게 살았나 보네~ 정도였지 굳이 라다크에서 배우자!고 할만한 것은

.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작자 나름의 대안 제시는 어쩌면 반론의 생길

지가 있다. 이를테면 환경 옹호론자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비칠 수는 것이다.


라다크의 변화를 서구식 자본주의의 침공으로 보는 것은 문화 전파 이론을 빗대어 보면 단견일

수 있으며, 개발의 부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도 없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형태의

개발이든 계획이 먼저 수립된다. 그리고 개발은 그 계획의 실행 과정과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개발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라다크가 관광지역으로 개발한다는 정책과

계획이 발표되면 개발은 주로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자가 번식을 거듭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가 제시한 중앙집권식 개발의 대안지방 분권적 개발 방법은 이미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중앙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관리 감독이 없이는 그 지역의 상황에 맞는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사례가 많은 방법이다. 그 취지와 목적은 맞지만

지역민의 자발적 주도가 없이는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대개의 지역 개발은 위정자의 업적주의나

개발업자의 경제적 논리에 의해 일종의 개발 유행을 만들어 내고 지역민들은 이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오히려 지역간 중복 개발이 진행되거나 지역 이기주의를 유발하는 폐단도

보이고 있는 터다. 또한 균형성장론을 내세우면서 지역 불균형에 의한 상대적 빈곤을 자극하는

선량들은 세계 어느 곳에선 기생하기 때문에 지방 분권적 개발 방법은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인

데도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린 감이 있었다.



또한 국가 경제를 자급 자족 경제로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지구에서는 불가능하며, 자급 자족

경제가 아닌 국가에서 지역 경제가 자급 자족 경제로 남기란 거의 공상에 가까운 것이다.

멀리는 한 때 구 소련 연방이 이런 시도를 했었고, 가깝게는 우리 북쪽 동포들이 아직도 외치고

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와 인접한 중국의 발전 사례 해안선을 다른 거점도시 개발 전략을 통해 국가 전체

적인 경쟁력을 높인 후, 서안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균형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그리고 서안

개발도 거점도시 개발 전략을 따른다. 그 결과 중국은 지금 세계 군사 대국에서 세계 경제 대국

으로 자리 잡았고 자국의 화폐를 기축통화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면서 자본주의적 사회주의 건설의

아주 굳건한 사례가 될 것인 양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연발생적이든

계획적이든 공간에는 도시라는 중심지가 발생하기 때문에 중앙집권식 개발 방식 효율성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많은 수의 중국인민들은 이 개발의 결과를 불행

하다고 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개발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라다크 사람들에게 제한된 수준의 개발을

권한다는 것은, 서구세계에서는 이미 해제해버린 그린벨트를 유독 라다크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서울 사람이 전라도에 가서 그곳 사람에게 아니 이렇게 공기도 좋고

농사지으며 여유롭게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공장을 유치하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한다면, 필경

그 사람은 목과 팔 다리에 깁스를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서울사람에게

서울은 그의 주체적인 삶을 메몰 시킨 부정적 의미의 도시일 수 있으나, 그 말을 들은 전라도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의 삶의 척추수 있는 삶의 전통이 심하게 휘었지만 지금의 그들에게는 개발을 통해

새로운 척추가 훌륭히 이식될 것이란 믿음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라다크 사람들을 서양식 개발의 패해를 인지하고 있는 서양인의 시각으로 그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그대로 라다크 사람들에게 이식되어 불행해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은 라다크 사람들에게 내재된 <오래된 미래>의 힘을 과소평가

하는 자만일 수도 있다.


이런 반론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 <오래된 미래>는 그 제목의 패러독스 만으로도 훌륭한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오래된 미래>의 가장 비슷한 문구는<새로운

과거>이다.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작은 것을 크고 화려하게 분칠 <생뚱맞은 과거>가

아니라 <새롭게 보는 과거>이다. 과거를 새롭게 보지 않으면 미래는 그저 <오랜된 현재>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3. 꼬치꼬치 파고 들기


Q1. 1975년 경의 라다크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았을까?


일단 그들의 자연환경을 한 번 살펴보자. 4개월의 여름과 8개월의 겨울. 그리고 히말라야

산자락의 고원 사막 지대. 이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것이면 그들의 생활방식과 전통에 대한

유추가 충분하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농경과 목축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외부와의 왕래도 쉽지 않은

지역이므로 자급 자족 경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식량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티벳 불교의 영향은 현생의 삶에 대한 집착을 멀리하게 도와 주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안분지족이라는 행복 방법론을 찾았을 것이다. 그들의 근검 절약과 재활용의 습성은

생활의 지혜라기 보다는 생존의 지혜였지만 환경론자인 서양인의 눈에는 미덕으로 보였을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나 부족은 근검절약과 재활용의 고조 할아버지, 아니 조상이다.


여러 가지가 부족한 상황이고 더운 여름이나마 힘든 농사를 힘들지 않게 지으려면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다. 비록 생존을 위해서지만 일을 놀이처럼 하지 않으면 그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을

대부분의 농경 사회는 알고 있다. 아마 이 책의 저자는 노동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에 일을

하며 부르는 노래가 신기했을 것이다. 또 짧은 여름 동안 농사를 지으려면 여러 집이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다. 노동요와 상호 협력의 공동체 역시 라다크의 생존의 지혜이다.


그리고 긴 겨울 동안 별로 할 일이 없다. 겨울을 보내려면 사람들끼리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를 잘 알게 되었을 것이고 친밀함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맨날 얼굴만 보면서 이야기하기는 맹숭하니까 음식을 마련하고 술도

한잔 걸치면서 작은 잔치 문화가 발달했을 것이고 이것이 주거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겨울이 추우니 화롯가는 자연히 상석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서로 모여서 아웅다웅하며

싸워 봐야 다음 농사에 품이 아쉬웠을 터이니 웬만하면 서로 기분 안 상하게 노력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서양인인 자에게는 배려상호 협조라는 개념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대화가 잦다 보니 호랑이 줄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는 잠언이 만들어

졌고, 아무리 못생긴 얼굴도 자주 보면 정이 드는 법, 그래서 외모보다 성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모 안 따지고 성격 좋은 사람들이니 긴 겨울 동안 달리

다양한 놀이가 없는 성인들은 자손 번식에 힘을 쏟았을 것인데, 한 이 여러 밭에 씨를 뿌리면

그 입을 어찌 감당했겠는가? 그러다 보니 밭 하나에 여러 이 씨를 뿌리는 일처다부제가 또

다른 생존의 지혜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상은 라다크의 문화를 폄하하려고 적은 내용이 결코 아니다. 문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라다크인들의 삶은 양식은 그들이 처한 자연적 인문적 환경과 상호 작용하면서 만들어 낸 생존의

지혜이다. 그러한 것들이 비교의 근거를 가진 이방인의 눈에 삶의 지혜로 받아들였을지라도

그것은 서구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에 대한 하나의 발견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라다크의 옛 모습이 저자가 행간에 의도하고 있는 것 같은 이상적인 사회 구조 혹은

모범적 공동체로서 여타 세계에 보존의 대상으로 비춰 질 수 있는 왜곡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적어 본 것이다.


Q2. 지금 라다크 사람들은 불행할까?


그건 모른다. 라다크 사람 스스로가 우리에게 고백하기 전에는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화폐경제가 활성화 되고 관광객이 범람하며 교통정체와 대기오염이 확산되고

사람들이 공격적인 성향이 짙어져서 화도 전에 비해 많이 내고 안정감이 약화된 그야말로 현대화

때문생긴 심리적 충격에 넉 다운된 모습의 라다크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수로에 누수가

생기면 자발적으로 보수하던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관리자 역할에 충실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이 내 일이 아니라 정부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퇴보를 만들어 내었고, 친밀감보다는 익명성이

더 익숙해져 버렸고 군중 속의 고독으로 몸부림치고 있으며, 느림의 미학이 빠름의 가학에 희생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아니지 않을까?


책의 내용을 일부 옮겨보자.


지난 16년 사이 레의 인구는 두 배로 불었다. 교육과 취업을 위해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

서 농촌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 좁은 지역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면서 적지 않은 사회

문제들이 생겨났다. 여름철이면 레의 도로들은 붐비는 차량으로 인한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을

정도가 된다. 공기는 디젤의 매연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전통사회의 예절은 현대 도시 생활의

밀어붙이기 식 생활태도에 밀려나버렸다. 좁고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살을 맞대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들 사이의 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멀어져 있다. 서로 돕고 사는 분위

기를 북돋아주던 지역의 정치경제구조는 이제 붕괴되고 만 것이다.


위의 문장을 다시 한번 꼬치꼬치 파고 들어보자.

인구 증가의 원인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과연 두 배로 불어난 인구가 기존의 자급자족형 경제

시스템으로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도시가 없다면 해결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도시는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지 않는가? 도시에 살면서 농촌의 서로 돕고 사는 분위기가 충만한

지역 정치 경제 구조를 고집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라는 반문도 가능하다.

레의 라다크 사람들은 농촌적인 행복 추구에서 도시적 행복 추구로 그 형태를 변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자는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 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한 사회의 정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사회의 정의다. 좀더 현실적인 것이 되려면 사회로부터의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는 욕심내지 말아야 하며 긴밀한 유대를 기반으로 한 상호 교류를 권장하는 사회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행복은 기본적인 인지상정의 충족에서도 오지만 불행을 인지하지 못한 행복한 착각에서 올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이 인지한 불행은 현재의 불행이 아니라 과거의 불행을

현재에 인지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잡으려는 과욕에 기인할 지도 모른다. 또한 한 지역민의

행,불행을 그,들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잠시 머물다간 한 사람의 이방인의 결론을 우리의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Q3. 라다크의 공동체가 분열되었고 전통이 파괴되었다면 그 주범은 개발일까?


흔히 개발을 이야기할 때 같이 따라 붙는 몇 가지 문구가 있다. 동전의 양면이라든지, 양날의

칼이라든지 신이 현대에 심어둔 선악과라든지 그리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라는 우스갯소리처럼 내가 하면 개발이고 남이 하면 파괴라고 우기는 이율배반도 있다.


라다크의 공동체의 분열과 전통의 파괴는 서구식 개발이 라다크에 적용되면서 시작한 것은 맞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그들의 전통적 삶의 양식이 서양인들에게 관광의 대상으로서 내재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정부에 의해 관광 산업 개발의 대상 지역이 된 것이 방아쇠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분열은 왜 이들은 막지 못했을까? 관광을 위해 보여주는 전통이

아닌 그들의 여유롭고 조화롭고 평온한 삶의 전통의 파괴를 왜 그들은 막지 못했을까?


직접 살아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개발의 이익에 현혹된 정부와 그 열매의 단맛을 본

몇몇 라다크 사람들이 그 때까지의 라다크를 유지한 주류시스템과의 타협 없이 전혀 생소한

시스템을 도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변화하는 사회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이들 소수의 주류는 다수의 평범한 비주류들에게는 성공적 변화 모델이 된 것이다.


주류의 휘몰이 장단에 생겨나는 문제는 비단 라다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많은 다수의 비주류들이 추구하는 삶은 소수 주류의 삶의 양태이다. 그들의 돈과

권력 그리고 사회 변화의 주도 능력 등이 성공의 잣대가 되고, 성공하기 위한 노력들은 결국은

주류가 되려고 노력인 것이다. 그리고 비교적 후진국의 주류들은 스스로의 뿌리를 뽑으면서까지

세계 사회의 선진 주류들의 흉내를 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라다크의 신주류들이 그들에게 불어

닥친 변화에 폭풍에 그들 공동체와 전통에 대한 뿌리를 너무 쉽게 내준 탓으로 라다크의 공동체

의 분열과 전통의 파괴한 서양인 학자가 안타까워할 정도로 진전되지 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서구적 경제의 도입과 그에 따른 개발은 어느 사회건 동일한 문제를 만들어 내고,

동일한 대응과 동일한 처방을 요구하게 될까? 만약 다른 지역이었다면 어떻게 묘사했을까?


일본을 한 번 생각해보자. 일본 역시 근대화 과정에서 라다크처럼 물질주의와 소외 공동체나

가족의 관계의 단절이라든지 여러 사회 문제가 노정되었고 라다크가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공격적 성향의 사회에 만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모든 전통의 뿌리에 있는 와()의

정신은 크게 변한 적이 없다. 혹자는 섬나라라서 안에서 죽기 살기로 치고 받으면 밖으로

갈 때가 없으니까 안에서 서로 같이 사는 방법으로 와()의 전통이 그들의 삶의 모든 양식에

깃들게 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거절 의견을 표현하는 혼네와 다떼마에의 전통이라고 한다.


이 와()의 전통의 뿌리 위에 줄기를 낸 것이 바로 장인정신이다. 이 장인 정신은 가업을 중시

하는 일본인의 기본적인 경제관으로 뿌리내렸고 나아가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일반적인 인식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나의 가업이 존중 받기 위해

남의 가업을 존중해 준다. 그리고 가업은 자연스레 전통에 대한 애착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전통이 자신을 더 자신답게 하는 것이라 여기며 전통에 대한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와()와 장인정신의 두 기둥은 친절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상품으로 만들어 냈고, 품질이나

제조와 관련한 기초 기술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만들어 냈다. 일본은 그들의 전통을

동양 문화의 상징이라 여기도록 서방 세계를 현혹했다.


이만하면 일본은 그들의 <오래된 미래>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아 일본다운 것과 개발 혹은

경제적 발전을 잘 엮어낸 사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일본 역시 그들의 <오래된 미래>는

그들 전체에 의해 기억되었다기 보다 소수의 면역력 있는 인사들이 주체가 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회적 변화도 동시에 모든 구성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초점이 그 움직임을

유도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도자의 문제는 자못 중요하다.


한 국가나 민족의 변화의 힘은 민중에서 나오지만 변화의 방향은 지도자에 의해 결정된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세상에 나온 지 꽤 오래되었 라다크 사람이 스스로가 자신들의

전통과 오래된 미래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반론이 이미 나왔어야 할 때가 지난 시점임에

도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라다크에는 아직 그런 지도자나 어떤 결집된 집단 의식이 다고

짐작해 볼 수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그것은 라다크 사람들의 책임이다.


베트남의 국부로 칭송되는 호치민은 전쟁 중에도 젊은 영재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게 하고 전쟁이 끝난 후의 베트남 민족의 미래를 짊어지도록 해외 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런 탁월한 혜안이 지금 베트남을 무섭게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을

봐도 서양인의 눈에 불행으로 비친 라다크의 공동체 분열과 전통이 파괴의 1차 혹은 2차적인

책임에서 라다크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라다크의 문제는 라다크 스스로 인식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서구인의 관점에서 보존되고 보호되어야 할 인문학적, 친생태학 생활방식의 가치 때문에

그들이 마련한 해결책을 라다크 삭람들에게 선택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구식

개발로 인해 라다크의 전통과 공동체 의식이 파괴되었다는 것과 별반 다름 없는 접근법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나마 기록했어야 옳다. 그것은 또 다른 흑백 논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꼬치꼬치 파고 들기는 밑천이 모자라므로 이쯤에서 접는 것이 좋겠다 ^^;; )




4, 타산지석


결코 얇지 않는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히는 라다크에서 배워야 할 오래된 미래를 요약하면

단 한 문장이다. 생태친화적이고 공동체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 그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활방식에 관한 암묵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생활 방식 자체는 보편성이 없지만 그 속에

내재된 암묵지는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는 보편성으로 인해 공감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자연적인 삶,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그리고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안정감 있는 삶에 대한

라타크 사람들에게 공유된 전통이나 생활 태도는 우리가 타산지석의 키워드로 꼽아야 할 것

들이다. 사실 이들 키워드들은 우리가 향수를 가지고 있는 멀지 않은 과거에 빗대어 보면

라다크의 특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닮아다. ( 좀 특색 있는 것이 일처다부제인데 이것을

타산지석의 키워드로 뽑아서 설을 풀자면 대한 민국 모든 남성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해야

할 것이고 또 나 스스로도 일처다부제는 손해 보는 느낌이라 내키지 않는다.ㅎㅎㅎ) 아니 오히려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더 깊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친자연적인 삶만 해도 그렇다. 요즘은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은 자연에 깃들어

살아온 삶이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연적이기 보다 자연적이다. 쉬운 말로

자연에 대해 애처가 수준이 아니라 경처가 수준이란 이야기다. 그런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자연에 대해 극복이란 단어를 쓰면서 개발에 임했고 그것에는 점차 지배라는 의미가 내포되게

되었다. 우리가 휴가 때면 산과 들과 바다를 찾는다고 친자연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

자연에 깃들어 살기가 어려워졌다면 더 이상의 지배욕을 버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인구, 그리고 세계적인 수준의 경제 규모에 맞는 시설을 갖추자면 개발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익이 아닌 최소한의 방어적 수준에서 시작한, 극복의 개념 정도에

머무는 개발의 초심을 다시 새긴다면 적어도 파괴의 수준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캬~ 신문 사설 같다~ ^^)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그리고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안정감 있는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농촌은 집성촌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가족이 확대된

공동체의 모습이었으며 그러기에 오히려 우리의 공동체가 더 전폭적인 정서적 지지가 가능한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도 도시화와 더불어 이웃이 함께하는 공간 배제된 집단

주거 형태라든지, 또 엄청나게 바빠지고 사람의 정서적 에너지를 고갈 시키는 사회 시스템

덕분에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그리고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안정감 있는 삶에 대한 향수마저도

거의 고갈되어 가는 지경이 아닌가 싶다.


반상회란 것이 한 때 있었다. 국민 통치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반장님의 강요(?)가

귀찮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웃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장이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퇴색되었고,

이제는 재개발이라든지 집단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이웃이라고 모이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이익은 공동체의 정신적 건강과 안정감에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이웃은 바로 적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타산지석이란 소제목을 걸고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라다크 보다는

한 10년 정도 먼저 시작했던 변화이고 적어도 10년 이상은 더 멀리 가 있을지도 모르는

변화이기에 오히려 우리가 <오래된 미래>라는 화두를 붙잡고 우리 한국사회를 다시 바라보고

그 해법을 구하려 한다면 우리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는 <오래된 미래>를 살리는 방법을 제공하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나를 잘아는 우리 파피루스 식구들은 국수주의자처럼 굳이 우리 것을 들고나오냐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또 대답한다. 아주 장황하게 ㅎㅎㅎ


그 이유를 들자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오랜 역사와 그를 통해 증명된 역량이고 하나는 철학 하는 민족이라는 전통이다.


역량에 대해 두서 없이 또 확인해보자.

우리의 조국 대한 민국전 세계 229개 국가 중에 영토 보유 규모 102위( 매우 작음), 전 세계

229개 국가 중에 인구 보유 규모 59위 ( 매우 적음 )인 보기에 따라서는 라다크보다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나라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경제력뿐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세계

수위에 속하고 있으며 문화적 역량도 만만치 않아 한류라는 열풍을 만들어 낸 나라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한 번 보자.( 2006년 12월 말에 카페에 올린 글을 기억하시는지)


세계 반도체 생산률 1위 / 세계 조선산업 1위 / 세계 철강 제조 산업 1위/ 세계 컴퓨터 보급률

1위 / 세계 초고속 통신망 보급률 1위 / 세계 LCD 생산 산업 1 /세계 단일 원자력 발전소

이용율 1위 / 세계 죄 검거율 2위 / 세계 화폐 제조 기술 2위 / 세계 휴대폰 산업 2위
세계 건설 산업 규모 3위,
/세계 자동차 생산규모 3위 /세계229개중 10대 채권국 /자체 군수물자

생산 17개 국 중 한 곳./세계 시장 50% 이상 점유 중인 물품 갯수 270개/세계 특허 시장 점유율

7위. / 세계 5번째 고속철도 보유국 / 스포츠부분 229개 국가 중에 10위권국가 /2002 월드컵

4강./2004 아테네 올림픽 9위/ 올림픽 개최국인 동시에 월드컵 개최국 중 하나/ 국민 문맹률 1%

(세계 최고) 입( 아니 손가락) 아프다.


그리고 3권 분립의 원칙하에 국민에 바탕을 둔 의회식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태를 이렇게 단기간

에 구사한 예가 우리 외에는 세계사에 없으며, 19세기 후반 영국의 산업 혁명이후 서구의

자본주의 발달은 일부 저개발 국가로 부터의 자본적 수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서 5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남의 나라에서 빼앗아 오는 것 없이 세계를 이끄는 경제 규모를

이룩한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 최근에는 자국의 문자를 수출(?)하는 문화적 저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세계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신기해한다.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는 많이 보여주는

한국인만의 특기인데 세계 대회에서 은메달 따도 서러워 눈물 흘리는 양궁 선수를 보고 기겁을

한다. 비록 안방이긴 하지만 월드컵 4강 때에는 그저 재수려니 생각했던 사람들도 올림픽 야구

에서 침 좀 뱉는다는 미국이나 일본도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거는 나라. 남의 나라 안방에

들어가 대회 TOP 10 리스트에 한국 낭자 이름이 반을 차지 못하면 그건 이미 LPGA가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린 여자 골프, 타이거 우즈와 맞대결해서 이겨버리는 배짱 좋은 남자 양용은을

보면서도 신기해 한다.


비단 스포츠 뿐만이 아니다. 냉전 시대의 한 축이었던 기술강국 러시아에서 우리나라 자동차

제조 기술을 빼가려고 했다는 사실(러시아는 기어이 복제차를 출시했단다), 세계 5대 조선소는

전부 한국에 있다는 사실, 세계에 몇 안 되는 자동차 만드는 나라지만 자동차 만든 지 얼마

되었다고 미국 시장에서 제법 큰소리 치며 파는 신세가 되어버린 기구한(?) 운명의 국가라는

사실 등등.


또한 국가가 주도한 것이었지만 새벽종이 울렸던 새마을 운동은 단순한 농어촌개발 운동이

아니라 공동의 의식을 제공했던, 그래서 개발과 관리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보기 드문 사례

세계에서 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변화의 역량

저변에는 바로 우리만의 <오래된 미래DNA> 있기 때문이라 주장해도 억지는 아니지 않겠는가?


내친 김에 하나만 더 가보자. 세계 어느 나라 국민들이 자신의 영토를 삼천리 금수 강산이라고

칭송하고 노래 지어 부르는가? 그리고 그 강산에 대한 주권이 빼앗겼을 때 가산을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일에 많은 한국의 부자들이 앞장 섰다. 그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주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가진 것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선비 정신란 우리 것이 살아 있었 때문이었다.


또한 IMF 때 한국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에 세계의 뉴스 지면을 도배했었다. 모으기

운동. 그것은 세금을 내고 나의 권리를 보장받는 정도의 서국식 국가 개념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나라가 어렵다고 민초들이 집에 모아둔 금을 가지고 나오는 것, 그것은 그 이전에

독립운동 자금 모으던 때에 발현된 우리 민족의 <오래된 미래>에 대한 저력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세계인의 호들갑이었다. 이처럼 한국은 <오래된 미래>의 역량은 언제든 위기에

처하면 거의 모든 민초들을 통해 살아나는 이상한 나라요 야릇한 나라인 것이다.

(역량에 너무 침을 튀겼다. ^^ )


두 번째 이유인 철학하는 민족적 전통에 대해서는 조금만 침을 튀겨보자.


현재의 대한 민국의 주요 철학사조가 무엇일까? 실용주의? 실존주의? 인본주의? 아니다.

그것은 서양과 동양의 철학이나 사상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나는 이것을 韓哲學,

朝鮮哲學 혹은 배달 마음 틀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 사람은 불교도처럼 삶을 생각하고, 유학자처럼 생활의 틀을 갖추며, 무속인처럼 기도하고,

기독교인처럼 세계를 향해 산다. 그리고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논제를 다 담고 있으면서도 통섭

적인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통해 과학에도 열려있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제시하는 아주 어려운 듯

보이는 양자역학의 설명에 대해서도 한국에서는 범부들도 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종교가 아니지만 세계의 주류 종교가 한국에 들어 오면 정말 괄목상대하듯

성장한다. 그저 모방의 성장이 아니라 재해석을 거쳐 독자적인 성격을 갖기가 일수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다. 해당 종교의 종주국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그들 종교의 성지를 이루고야 만다. 또한 모든 종교를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모든 철학을 종교

처럼 신앙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성은 오랜 전통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민족의 철학적 전통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은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의 철학적 무기였고, 이 생각의 무기가 인류사에 보기 힘든 무혈 역성혁명을 이루는

근간이었던 것이다. (사실 조선은 교과서에 기술된 것처럼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가 아니라 새로운 철학에 힘입은 신진 세력들의 제도와 체제의 개혁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새로운 정권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철학적 전통 때문에 관료로 세상에 나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사서오경은 기본으로 공부해야만 했다. 그런 그 사서오경 중 하나를

구해서 펼쳐 놓고 한 번 읽어 보라. 그곳에 뭐가 있는가? 바로 철학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는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왕에서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철학적 소양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다.(물론 그 폐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런 철학적 역량과 전통은 결정적으로 공부(학문)에 대한 생각과 교육의 목적을 차별화했다.

유학도 갈래가 나뉘어져 여러 학설이 나고 들었으나 이를 통칭하여 전체적으로는 道學이라는

틀에서 이해되었다. 道學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서의 공부였다.

전자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과 균형 잡힌 삶의 추구에 대한 공부로서 개인이 가져야

할 비전과 이상과 기상 그리고 태도에 대한 공부였다. 그리고 후자는 더불어 사는 삶에서 나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한 공부였다. 그래서 그 때의 공부는 지금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는 공부처럼 경쟁의 무기가 아니었고 남을 주기 위해 공부하는 스스로의 훈련이었다.


교육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하자면 정말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작금의 경쟁 시스템에서

행복과 만족을 가르치는 시스템으로 신속히 전환해야 한다. 지금의 학교는 아이들을 훈련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이 병들어 가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대학 입시에서 국어 영어 수학에 대한 비중을 아주 작게 줄여야 한다. 그리고 철학에 점수를

많이 배당한다면 국어나 역사를 따라서 공부하게 될 것이고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알고,

내가 왜 사는 지를 알고 공부를 소명과 재미로 하는 아이들이 될 것이다.


우리의 <오래된 미래>에 대한 역량과 철학적 전통을 생각해보니 막연하나마 어디 가서 시끄러비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설은 정리 된듯하다. 그런데 오래된 미래 못지 않게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바로 <오래된 현재> 즉,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바람직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문제이다.


얼마 전 기사 검색을 하면서 19년간 의료 봉사를 한 의사에게 법을 내세워 벌금과 영업 정지

처분을 내린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오래된 현재>의 단면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단면은 바로 도덕에 대한 왜곡이었다. 도덕(도학이라고 해도 좋다)은 무엇인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 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하면 좋은 것을

독려하려는 사회적 정의가 되어야 함에도 가르치기를 잘못 가르치다 보니 이 일을 행한 공무원은

상식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도덕불감증 환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도덕 불감증은 전 후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의 부산물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IMF 이 전만 하더라도 외국에서 보는 한국 경제의 3대 불가사의가 있다고 한다. 첫째가 부실한

사립대가 절대 안 망하는 것, 둘째가 부실한 은행이 절대 안 망하는 것, 셋째가 부실한 대기업이

절대 안 망하는 것이란 다. 물론 요즘은 좀 달라진 면이 있지만 이런 관행이 우리 486세대의

기억 속에는 아주 생생히 남아 있다. 이런 관행은 반기업 정서를 낳았고, 반 관료주의를 낳았고,

또 기업을 통한 성공에 대한 반감을 낳았다. 성공은 부패를 먹고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크게

자리 잡았지만 대중은 그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얻지 못하면 손해라는 의식으로

개인 이기주의를 키워 집단 이기주의를 만들고 계급간의 갈등과 대립의 사회적 양상을 만들었다.


연전에 TV 특강에서 도올 선생이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면서 하던 일갈이 생각난다.

여러분, 대한 민국의 미래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상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반 부패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공감한다. 그리고 반부패 운동이 개인에서 집단, 국가에 이르기까지 확산된다면 우리가 후손에

대해 가질 <오래된 현재>의 유산에서 하나쯤은 미안함을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지금의 우리가 이 <오래된 미래>라는 화두를 천착해 나아가야

할 막중한 임무를 가졌다고 착각하면서 살아보자는 것이다. 착각의 대부분은 우리가 가진 경험

이나 선입같이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심리적 맹점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의 실체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인간 뇌의 어쩔 수 없는

<오래된 미래> 때문에 왜곡하여 세상이나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다.


착각은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생소한 발명일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된 미래>를 주목하게 된 계기알고 보면 인간과 자연과 삶에 대한 착각 때문에

생겼던 것이고 또 착각에 대한 자각 때문에 <오래된 미래>를 상고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날 각광 받는 새로운 물리학이라 불리는 양자 역학의 대 명제는 실재와 인식의 GAP

하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 1장 1절을 읽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바로 그것으로 양자 역학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노장의 철학이 공맹의 오랜 논리적 인식의 주류에 항상 밀려있는 듯

하면서도 직관적 인식이라든지 통찰, 통섭의 원리 혹은 방법론으로 결코 주류에 밀리지 않는

맥을 이어온 것도 어쩌면 우리가 우리에게 깃든 오래된 미래를 보존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신경제 논리에 의해 양산된 금융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의 경제가, 미국의 리먼 사태로

인해 풍비박산이 날 때에 아랍권의 금융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돈으로

돈놀이하는 것을 막는 종교적인 가르침 때문이란다. 이것은 세계의 주류 시스템의 문제가 비주류

시스템에서 해법을 찾은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다크에서 오래된 미래의 지혜는

어쩌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비주류의 해법을 찾는 아주 작은 계기가

아닐까?


어쨌든 <오래된 미래>라는 이 패러독스를 가지고 원고를 쓰면서 저녁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냥 온고이지신이란 단어에는 무관심하다가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에는 재미를 들였던 내 자신의 얕은 지적 허영을 바라보며 이것도 언젠가는 나의

<오래된 미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라 믿으며 글을 줄인다.

( 늘일 만큼 늘여 놓고 줄인다니 내 참~~ ㅎㅎㅎ )



6. 후기.

글을 써 놓고 오자나 고칠 심산으로 읽어보니 논리적 흐름도 엉망이고, 서평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닌 정체성이 없는 글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가 라다크에서 배웠다는 <오래된 미래>나

그것이 붕괴되는 과정이 우리에겐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고 또 현재도 우리가 겪고 있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막연한 의도는 우리를 한 번 돌아 보고 한국의

<오래된 미래>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정리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간 읽고 들은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자랑하듯

떠드는 것처럼 페이지 수만 늘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냥 내려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만

다시 뭔가 원고를 목적으로 적으려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사족이 후기입니다.

(ㅎㅎㅎㅎㅎ)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담론적인 주제는 개발과 환경 보호의 대립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시장이라는 경제의 논리와 환경이라는 삶의 질의 논리의 충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완벽한 환경의 논리를 준거로 하지 않고 시장과 환경의 타협안을 상정한 상태에서

이 책을 쓴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시장과 환경의 자기 절충인 것이지요. 여기서의 시장은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미화된 인간성 말살의 폭력적 도구이고, 환경은 인간이기에 가지는 자연

귀소 본능의 저항입니다. 이 폭력과 저항은 한 시점에서는 매우 날카롭지만 시간의 틀을 길게

가져가면 흡사 진화이거나 타협인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 타협안이 바로 전통이지요.

그래서 라다크인이 그렇게 살게 된 것은 환경과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된 생존의 지혜였다는

주장을 좀 길게 썼습니다만 의도만큼의 날카로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 살고 있는 이 시기는 거대한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생각됩니다. 그 전환은

기존의 시장 기득권을 획득한 자들의 영속성 노력과 기득권의 분배를 요구하는 신진 세력 간의

갈등의 모습으로 종종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사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출현으로

분배 기반의 실험이 이루어졌으나 그것 역시 분배 논리의 기득권을 만들어 내는데 기여했을

뿐 대안 마련에는 실패9한 것이지요. 저는 그 실패의 주요 원인이 바로 우리가 인간에게 너무

함몰되었다는 것에 두고 싶습니다.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의 저변에는 사람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이 미화되어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 근저에는 우리 스스로 사람으로 대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적게 가졌든 많이 가졌든 돈을 가진

사람만 보게 됩니다. 고객 감동이니 고객 만족이니 이런 모든 것이 다 사람이 사람을 가지고

하는 장난입니다. 그러면 돈이 없는 사람은 최근까지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이기 위해 기를 쓰고 돈을 벌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은 인간이 인간만 바라보다 보니 인간을 담고 있는 그릇에 대해 즉 자연 혹은 환경

과의 관계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이 공동체가

다 행복할 수 있는 절대적 부의 창출에 둔다면 상대적 부의 편재 때문에 생기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에게 죽어라 공부를 시키는 이유가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인간 대접 못 받을 걱정 때문에 시키는 이런 왜곡은 없어

져야 합니다. 다들 불행한데도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조금 덜 불행하다면 그것이 성공이라고

착각하는 식의 경쟁의 논리를 배제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불행히도 우리의 오래된 미래에서는 이런 역사적 실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적 실험은 앞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가 될 것입니다.


언제부터냐고요? 지금 우리부터!

무엇부터냐고요? 우리의 생각부터입니다. 가장 중요한 생각은 청지기 정신입니다.

우리 삶에서 내 것이라는 것은 사실 내가 관리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터전이 내 것인 양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가진 자, 지금 있는 자

뿐 아니라 앞으로 가질 자도 스스로 자기 것을 공동체를 위해 내어 놓는 것이 사회적인 당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기부의 미담을 없애기는 하겠지만 만족과 여유를 공유하는 시스템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냐고요? 나만, 내 가족만, 우리 집안만, 우리 지역만, 우리 나라만 에서

바꾸면 됩니다. 의 배타에서 의 참여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공의 척도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에서 더 많이 세상에 기여하고 사는 삶으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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