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거장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저서 ‘존재의 용기’에서 사람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누구나 다 불안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언젠가는 ‘꼭 죽는다’는 죽음의 운명 때문에 불안해한다고 합니다.
죽음의 운명이 언제 우리에게로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재의 불안’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언제 심판과 불행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오는 불안입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 하나로 그보다 몇 십 배의 보복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입니다.
이것을 ‘도덕적 불안’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돈을 벌면 벌수록 반비례하여 생겨지는 공허감, 명예와 권력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 속에 이상스럽게 침투하여 들어오는 무의미성, 선한 일을 하면 할수록 뒤따르는 짜증과 불만,
이것을 ‘영적 불안’이라고 합니다."
위의 글은 호주 시드니 교회의 김해찬 목사님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멀리 보면 담담한 이것이 가까이 있으면 매우 불안해진다.
물론 멀리 보고서도 담담해질 수 없어서 용을 쓰다 죽은 역사적인 인물들도 많다.
반면에 죽음을 가까이 두고도 담담히 생을 마감했던 인물들도 많다.
오늘날 대한 민국의 일반적인 국민들은 이런 존재의 불안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대처할까?
단지 나의 추측이지만 나는 , 아니 우리는 이런 사실을 곧잘 망각하고 산다.
건망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중증이다.
그래서 인면수심의 인물도 등장하고 또 지나치게 세상에 호기를 부리며 사는 이도 등장한다.
또한 오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 대부분은 오늘의 변화를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도덕적 불안은 아마도 선악 구분 중독증 환자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신은 선악을 구분하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한계 내에서 선과 악의 구분 조차도 분명히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무엇을 항상 선과 악 어느 한 범주에 쌓아두려 한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에 나오는 내용 처럼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사람을 죽이는 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우린 뚜렷이 구분하지 못하지 않는가?
선과 악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에게 선한 것이 있게 하기 위한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희생이라는 미덕은 종족 전체에 돌아갈 보복에 대한 방책일 것이고...
종교는 이런 선악의 구분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영적 불안이 생의 의미와 관련한 것이라면 영적인 것은 단지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의 문제이다. 인간은 생명으로 살다 생명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살다 의미로 인해 죽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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