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호흡이 긴 이야기다.
하지만 그 긴 호흡을 한 번에 다 들여 마시고 내쉴 수 없다.
끊어 읽어 보면 철학이고 문학이다.
떼어 읽어 보면 희극과 비극의 단막이 교차한다.
이어 보면 근원을 모르는 출발에서 죽음까지 이르는 서사요
대충 건너 뛰어 보면 아침 드라마 보다 더 역겨운 막장이다.
대학시절 안소니 퀸의 투박하게 기억되는 연기(演技) 때문에
학교 앞 헌 책방에서 산 낡은 책을 들었다가 이내 놓았던 기억이 난다.
나의 20대는 이런 호흡을 허용하지 않았나 보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적응할 수 없는 호흡이었다.
내 유년 시절 유일하게 심야 시청이 허락된 것이 바로 명화극장이다.
나에게 <희랍인 조르바>는 흑백 영화로 기억된다.
영화가 컬러로 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나이 만큼 오래된 영화는 흑백 TV를 통해 내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느꼈던 온갖 형형 색색의 감각과 감정들이
책을 놓으면 표백되고 창백해진다.
그리고 그 색들이 어느새 이야기 속의 <나>가 아닌, 지금 나에게 덧씌워져 버린다.
그리 깊지도 넓지도 않은 먹물로 반쯤 그린 동양화 한 폭에
그저 원색도 아닌 흐린 단색에 무수한 무지개색 점이 뿌려진 서양화 하나가
마치 유화처럼 덧칠된 꼴이다.
사실 흑백영화와 컬러영화 중 어느 것이 오래 기억될까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아마도 흑백영화 쪽이 아닐까?라고 답을 내었었다.
왜냐하면 영화는 장면과 스토리는 기억 나는데 그 색감은 거의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컬러로 꿈을 꾸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 책의 다양한 주제와 이야기도 책을 덮은 후에 상고해 보면 단편적인 흑백의 이야기로
조각나곤 한다.그리고 그들 조각들은 단순한 흑백 논리로 갈무리되어버리고...
조르바가 좋으니 싫으니, 조르바의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싫으니 등등.
거친 삶 앞에 길게 쉬었던 호흡이 짧은 한숨 정도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보며
우리 스스로에 대한 삶의 평가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와 조르바는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한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생각하는 나와 행동하는 내가 다르다.
생각하는 나는 행동하는 나를 원하지만
행동하는 나는 세상에 너무 많다.
그들과 같아 지고 싶지 않아
나는 다르게 행동하는 나를 꿈꾼다.
하지만 꿈만 꾼다.
행동하는 나는 항상 두렵다.
그래서 조르바는 <나>에게 기댄다.
<나>를 깨치는 선각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여 조르바다움을 만들고 자기 존재의 이해를 구한다.
<나>나 조르바나 서로에게 창(窓)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자신에게 갖힌 서로의 나를 우리에서 몰아내려는 창(槍)일지도...
내가 원하는 나는 <나>도 아니고 조르바도 아니자만
지금의 나는 <나> 같고
내게 필요한 나는 조르바 같다,
이 소설이 긴 호흡만큼 큰 깨달음의 해법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리스인이 불가의 연기(緣起)를 이해하고 작품에 반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에게 붓타는 유일신과 신화 속의 무수한 신들이라는 모순을 무리없이
소화해 내는 그리스인들의 모순을 꼬집을 수 있는 제3의 잣대로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상호관계의 결과의 이어짐을 단지 친구의
죽음을 예감하고 조르바의 죽음을 예감하는 따위의 사건으로 소설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작가의 태생적 한계다. 토샤유불도카기를 한몸에 지닌 한국인은 이해할 수 있다, 이들 그리스인을.)
작가의 자기 성찰적 시도는 내게 또 다른 생각을 품게 했다.
가끔 서가에서 꺼내 부분 부분 읽어도 나이가 드는 만큼 느낌도 익을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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