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오늘 아침 이 풍경을 보았다면 아마 난 숭고함을 느꼈을 것이다. 살짝 비를 뿌린 구름이 지나고 푸른 하늘이 구름 위로 물감 번지듯 넓어지고 얇아진 구름 사이로 비치는 서광이 동편에 자리 잡은 아침의 태양이 건강함을 알려준다. 산자락에는 힘빠진 구름이 축처진 모양으로 산을 밴치 삼아 걸터 앉아 있고 그 앞을가리고 있는 야적장 컨테이너 박스 같은 건물들이 좀은 흉물스럽게 느껴진다. 사람 사는 곳인데 이런 생각 하면 안되지 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위해서라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연에게 입힌 억지스런 분장에 대한 미안함이 더 크다. 200년 전 이 곳에 한 사내가 아침을 보며 지금 이 풍경을 상상하지 못했듯 200년 후의 한 사내는 지금 이 풍경을 상상하며 그리워할까? 제발 공상 과학 영화의 흉물스런 풍경만은 아니기를 바래본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은 풍경이 경건한 아침이다.
마침 부활절이라 예쁘게 포장된 달걀이 떠오른다. 부활의 상징으로 기독교에 도입된 풍습이지만 삶아서 주는 달걀에 무슨 부활이 있냐며 기독교를 힐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 말들에는 단지 상징적인 의미임에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삶에 완벽성을 추구하라는 억지가 옅보이인다. 어떤 상징에 대해 의미는 단지 부여되는 것이다. 타인의 그런 의미 부여를 호 불호의 잣대에 올릴 수는 있지만 옳고 그름의 잣대에 올리기에는 우리 스스로가 부족하지 않을까?
단지 부할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언어의 사회적인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부활이란 단어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난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한자의 의미 곱씹어 보면 가슴에 담은 희망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그로인해 육시이 생기를 되찾고, 가볍지만 진중한 발걸음으로 치열한 삶의 여정으로 걸어가는 꺽이지 않는 의지가 후광처럼 비치는 주인공의 귀환 같은 장면이 연상된다. 어떤 영화에서는 부활은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사람들은 다시 찾는 삶의 의지, 다시 찾은 열정, 다시 찾는 사랑의 장면 하나만 있어도 영화비가 아깝다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이 부활에 감동을 받는 것은 부활 그 자체가 아니라 부활의 장면 속에서 반전이라는 모멘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멘텀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부활을 자기화 할 수 있는 컨텐츠들이 더 많아 졌으면 좋겠다.아니 이미 지천으로 갈린 컨텐츠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는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오늘은 3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부활의 감동이 시작되는 첫날이다.
아름다운 창 밖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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