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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잡생각들

[스크랩] 사람과 사랑에 대한 넋두리

 

 

[ 사람과 사랑에 대한 넋두리]


<사람이란 주제>

 

'사람'이란 주제는 쉽고도 어렵다. 사람은 2000년 전이나 지금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통속적이고 뻔한 존재이면서 지금 내가 맞닥뜨리는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존재이다. 사람은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서 부모에 의해 길러지고 그럭저거 살다가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가 죽은다. 사람은 부유하게 혹은 가난하게 살며,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거나 혹은 불행하다고 느끼며 산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이렇듯 뻔하고 통속적인 사람을 통째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남자와 여자로 갈리기 때문일게다. 이 갈라짐이 필연적으로 만남이라 것을 가정하게 된다. 이 만남이 모든 어려움의 원인이다. 우선 장난 삼아 산수를 좀 해보자.

 

남자와 여자가 1대1로 만나면 통속적인 경우의 수는 같이 잘살거나 혹은 따로 잘살거나 두가지 경우 밖에 없어야 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각자가 호/불호의 2진 함수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1대1의 만남이 2의 2승의 경우의 수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 남자가 둘이고 여자가 둘만 존재해도 이들의 만남의 경우의 수는 8가지 정도로 보이지만 짝을 이룬 양자 중 하나가 다른 짝의 한 찍과 바람을 피는 경우와 짝을 이룬 양자 중 하나가 짝을 이루지 않은 남녀와 바람을 피우는 경우 혹은 양자 모두 바람을 피우는 경우 등등을 계산하면 경우의 수는 일견 보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의 두배가 된다. 지구상의 약 70억인구의 절반이 남자이고 절반이 여자이니 그들이 물리적 공간이나 모든 사회적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 '만남'을 가진다면 이들 남녀의 만남의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가정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좀 추상적인 접근을 해볼까? '여자는 꽃이 되고 싶어 하지만 꽃은 여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자는 꺾여야 삶의 한 쪽을 채우고 살지만 꽃은 꺾이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자는 스스로 꺾이는 걸까? 아니면 남자가 꺾어 주어야만할까?  '남자는 종종 나비에 비유되지만 대부분의 남자는 나비처럼 이 꽃 저 꽃을 함부로 날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자를 나비에 비유한 것은 여자일까? 아니면 남자 스스로일까? 왜 그랬을까? 크게 논리적이지 않은 앞의 두 문장을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런 질문  몇가지에 벌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하지마 소설을 쓰거나 드라마 작가가 될 요량이 아니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 또한 다행이다. 결국 '사람은 쉽고도 어렵다'가 답이 될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우리는 때로 뜬금없는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으려 골똘히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사람에 귀착된다. 예를 들자면 봄 산책을 하면서 은근히 다가오는 꽃향기를 맡으면서 뜬금없이 "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렇다 라고 답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니다 라고 답을 할 거이다. 아니다 라고 한 사람은 종국에는 사람에 귀착하고 만다. 그들이 확신하는 답은 '사람 향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괘변은 또 이렇게 이어질지도 모든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 냄새이고 그 이유는 바로 그 음식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향기 혹은 향수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도 사람의 향기, 즉 사람에 귀착하게 될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로서의 사람의 향기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분명 가장 역한 향기 역시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병자나 거지 늙은이의 쉰냄새나 꼬린내를  예로들지 않더라도 사람은 사람이 행하는 많은 행동들이나 생각들에서 우리는 그런 역한 냄새를 느끼기도 하는 희안한, 때론 대단한 존재이다.  이런 존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는 향기는 사람 향기다. 이런 존재가 제일 고파하는 것 역시 향기로운 삶,향기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의 삶이란 사람의 향기를 좆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의 향기는 무엇일까?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갖추게 될까? 도대체 아무런 향기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아니 나는 향기를 가진 사람일까? 어떤 향기를 가졌을까? 내가 원하는 향기는 무엇인가? 또 내가 좋아하는 향기는 무엇인가? 이런 호사스런 생각을 이 번 분기에 한 번 해보는 것은 어떨가 싶다.
 
사람과 동의어가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표현 속에는 어찌보면 중간고사 범위를 묻는 학생에게 항상 "교과서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답하는 선생님의 고약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이란 주제는 "배운데에서 배운데까지~"라고 말하는 왠지 인자한 선생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사람...세상 보든 사람에 대한 이해는 두리뭉술할 수 밖에 없겠지만 내기 겪은 사람은 그 오미(五味)가  분명하다. 하지만 내 미각이나 후각도 상황에 따라 다른 맛을 내기에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한 것이 이 번 분기 주제다. 그리고 도서 선정 위원장이니 책을 정하고 발표할 기회가 없으니 <내게 좋은 사람>이라고 주제를 좀 더 한 정해서 생각을 정리해 본다.

 


<내게 좋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그런 답을 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런 질문을 해주는 예의가 고맙다.

 

축복을 묻는 질문은 사실 '행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다. 하지만 축복은 복을 기원하는 것이고 행복은 복을 누리는 것이라 둘은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좀 들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 좋은 사람 만나시기를!"라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좋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다. 나이가 들면 실제로 이가 시리고,옆구리가 시리고 어깨가 시린 것을 느낀다. 시리다는 느낌은 고통이라기 보다는 불편하고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큰 병이 목전에 있는 것 같은 꺼림직함 느낌이 아닐까 싶다. 그런 때에 혼자서 떨지 않도록 나의 체온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그리고 굳이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사람이 또한 고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좋은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 가끔 좋은 사람 ,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 한 사람에게 좋은 사람, 나에게도 좋은 사람,나에게만 좋은 사람 정도로 구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정말 좋은 사람은 누구일까?  나에게 누가 이 질문을 한다면 앞의 예에서 하나를 고르지 않고 다른 답을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사람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와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으로 좋은 사람은  내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항상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강박을 가진 사람이다. 나와 인연을 맺고 살아도 해가 될 것이 없는 사람이디. 하지만  그가 속으로 쌓아 둘 스트레스나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는 그리 좋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가끔 좋은 사람은 그저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 가끔 좋은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결국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객관적으로 좋은, 착한 사람이다. 같이 어울려도 나쁠 것이 없는 사람이고  앞으로 나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여지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저 나와는 별 무관한 사람이다.때문에 내가 시릴 때 그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 역시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만약 그가 한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라면 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만 좋고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라면 그는 나쁜 사람이다. 한 사람을 위해 세상 진실을 외면할 수도 있는 사람이므로 좀 위험한 사람이다.

 

 나에게도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내가 시릴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가 좋은 사람임을 내가 확신할 수 잇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역시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람이다. 아픔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내가 인간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만 좋은 사람은 좀 불쌍한 사람이다.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기 위해 그가 포기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그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다해도  그로 인해 타인들에게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슬픈고 아픈 사람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쁜 사람이지만 그것이 반면교사가 되어 내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면 그는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다. 말하자면 내가 좋은 사람이게 해주는 농약 같은 사람이랄까? 농약은 기본적으로 독약이다. 하지만 독이 약이 될 때도 있다.

 

이렇게 보면 내가 말한 답이 위의 예들 중 하나에 있어 보인다.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그 답일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와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아픔을 나눌 뿐 아니라 때론 독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큰 정의를 위해서 때론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하지만 그렇게 해 놓고 떠난다면 그는 나쁜 사람이다. 물론 기억 속에서야 남아 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시린 구석을 함께 나눌 수 없다면 그는 결국 타인으로 회귀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마음이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애틋한 사람이다. 그리고 웃음과 함께 눈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게는 함께하는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어디까지가 사랑일까?>

 

우리 삶의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인 사랑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사랑은 받아도 축복이고 주어도 축복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쩌면가장 쉬운 축복인지도 보른다. 그저 주거나 받으면 되므로...하지만  사랑이란 것이 살면 살 수록 쉽지 않은 축복이란 걸 우리는 알게 된다. 단지 남녀간의 사랑만 따져도 사랑은 쉽지 않은 축복이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며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도 하고 , 어떤 이는 비록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고자 마음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라고 덜컥 규정할 수 없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나머지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은 진정한 축복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때론 사랑은 사랑과 충돌한다. 그리고 그렇게 맞붙은 사랑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그 때는 축복받은 사랑이 흡사 저주가 포장되어 배달된 것이라 여기기까지 한다.한 번 이라도 그런 생각에 이르면 사랑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고 굴레다. 그리고 그 굴레를 벗어나야 행복해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굴레를 벗어난 어느날 돌아보면 그 굴레가 사랑의 흔적이었음을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흔적을 축복이라 여기기는 않는다. 실제로 모든 사랑의 흔적은 축복이 아니다. 사실(fact)은 아픔일 뿐이다.

 

사실 축복으로서의 사랑은 아픔이 없거나 사랑을 확인할 정도만의 아픔이 적당히 섞인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축복하는 것은 받는 사랑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사랑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행복과 아픔을 함께 담은 항아리를 받아든다. 그리고 서로가 그 항아리를 들고 주고 받고 견디고 나누고 한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좀더 분명히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시작되는 사랑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아마도 시작하는 사랑의 열정의 크기( 양적 크기라기 보다는 질적인 강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가 그 사랑의 유호기간을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빅뱅이 우주 팽창의 근원인 것처럼  시작되는 순간의 사랑의 열정이 그 사랑을 키워가고 꺼지지 않게 해준다. 시작하는 사랑의 열정은 심지어 헤어지는 순간에도 살아 있다. 그 사랑의 열정이 없다면 헤어짐은 결코 아픔이 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사랑의 고뇌로 인한 방황을 아름답게 바꿔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열정이 식는 그 순간까지일까? 그러면 열정은 어떤 식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열정이 식었다는 것은 사랑을 떠올려도 무덤덤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추억은 간절해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덤덤하기에 떠올려질 수 있는 것이다. 간절해서 떠올린다면 그것은 추억이 아니고 사랑이다. 즉 과거가 아니고 현재라는 말이다. 현재는 곧 열정이다. 열정이 없는 현재는 시간이 멈춰버린 현재이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현재 과거 미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이 만나는 무덤덤함이란 벽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과 같은 상징이다. 그 상징은 사랑이 주는 삶의 의미의 존재 여부를 구분한다. 그 상징은 바로 열정의 경계요 사랑의 종말인 셈이다. 더 이상 팽창하지 않는 우주는 그 스스로 담고 있는 블랙홀 속으로 소멸한다. 마찬가지로 열정이 사라진 사랑은 냉정 속으로 소멸한다.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모든 감각의 각성에서 무덤덤까지 혹은 열정과 냉정 사이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 그 경계를 성급하게 잡기도 하고 느긋하게 잡기도 할 뿐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사랑이란 없다. 다만 그 경계를 옮길 뿐이다.

 


하도 카페가 조용하길래  한 번에 다 못읽을 분량의 글을 쓰겠다고 시작했는데 내 재주가 그렇지는 못한가 보다. ㅎㅎㅎ

출처 : 파피루스 아침 독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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