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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잡생각들

조선일보 2014.10.21.김남기 해설위원 논설에 대해

 

조선일보 2014.10.21.김남기 해설위원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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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군이 여객기에서 일등석 승객들로부터 좌석 양보를 제의받은 이야기는 건강한 사회, 선진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지난 9일 국내선 여객기 일반석에 타고 있던 미 육군 앨버트 마를 일등상사가 승무원에게 제복 상의가 구겨지지 않도록 상의를 옷장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승무원은 "옷장은 일등석 승객용"이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이 장면을 본 일등석 승객들이 앞다퉈 마를 상사에게 "내 자리에 앉으시라"고 제의했다. 마를 상사가 정중히 사양하자 일등석 승객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해줘 고맙다. 옷이라도 보관하게 해달라"고 다시 요청했고, 마를 상사는 마지못해 상의를 건넸다는 이야기다.

 

마를 상사는 어떤 군인이었까. 그의 제복 상의 양쪽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10여개의 화려한 표지가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상의 오른쪽 맨 위에 붙어 있는 파란 배지는 마를 상사가 실제 전투에서 적과 싸운 전사(戰士)임을 알려줬다. 배지 아래 빨강·노랑·파랑 등 알록달록한 네모 표지들은 그가 공적(功績)을 세워 여러 가지 훈장과 포장을 받았음을 보여줬다. 훈포장 아래 금속 배지는 마를 상사가 공수, 공중 강습, 특수전, 유격 등 각종 훈련과 교육·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았음을 증명해줬다. 상의 왼쪽 명찰 위에 있는 삼색(三色) 표지는 마를 상사의 소속 부대가 표창을 받은 사실을, 그 아래의 휘장들은 마를 상사가 우방국과 실시한 합동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보여줬다.

 

마를 상사는 훈련과 전투라는 군인의 본분(本分)을 다한 사람이었다. 일등석 승객들이 마를 상사에게 경의를 표시한 것은 미군은 늘 본분을 다하고 그런 미군은 존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 사이에 형성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군복을 입었더라도 승객들이 그렇게 경의를 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요령 피우거나 딴짓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에 충직하고 성실한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본분을 다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세월호 참사는 그 결정판이다. 그러나 세월호뿐만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대형 인명 사고의 뒤를 따져 들어가 보면 제 할 일을 다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민간인이고 공무원이고 가릴 게 없다.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는 질책에 '나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사가 돈을 받고 학생기록부를 조작하고, 그 교사에게 돈을 준 학부모는 "다들 그러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게 우리 사회다.

 

자기 본분을 다하는 사회가 되려면 그런 사람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존중받는 풍토가 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정반대다. 본분에 충실한 사람은 고지식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아부와 뒷거래, 편법과 술수에 능해야 유능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출세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묵묵히 자기 일에만 충실하려 할까.

 

마를 상사와 승객들 이야기는 자기 본분을 다하는 개인, 그런 사람을 존중해주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그런 사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살맛 나는 사회인가를 깨닫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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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논자가 무슨 이유로 이 글을 썼는지는 짐작이 간다. 그리고 이 글을 좋은 글이라고 내게 보내 준 사람의 마음도 안다.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 선진 사회란 말에 토를 달 필요는 없다. 특히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국회니 청와대니 보내 놓고 전전긍긍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논자가 하고자 하는 말의 시작만 듣고도 격하게 공감을 하는 바다. 하지만 여기에 동원된 미담이 과연 미담인지는 따지고 봐야 한다. 아니 이것을 미담이라고 소개하는 글을 여과없이 싣는 조선일보의 수준은 선진사회 건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

 

출발은 승무원 부터다.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보관해 달라는 고객이 요구에 "옷장은 일등석 승객용"이라며 자본주의적 차별의 카드를 내밀었다.건전한가? 그리고 승무원이 이러한 차별은 고객 만족이라는 단어를 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한 미국식 자본주의 정신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고객의 사소한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 행동이 과연 선진인가? 이 승무원이 건전한 사회에 속한 불건전한 일개 국민이라 치고 넘어가자.

 

다음은 전사라는 그 군인이 달고 있었다는 훈장과 포장이다. 물론 성실한 군인의 상징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최근 벌인 전쟁 중에 도덕적 선을 주장할만한 전쟁이 과연 있는지 따지고 볼 일이다. 그런 전쟁에서의 훈장은 어쩌면 무고한 사람을 어쩔 수 없이라도 죽게 만든 결과를  통해 얻어지는 것 아닌가? 또한 그런 군인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일등석을 양보하는 승객은(단수를 사용한 것은 너도 나도 그랬을리가 없다. 미국은 나와 상관없는 일에 철저히 None of my business라는 카드를 꺼내드는 나라로 유명하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보면 알겠지만 일등석의 출입은 대게 티켓이 있어야 하는데 마들 상병이 승무원에게 요청할 때 그 주변에 일등석 승객들이 버그버글한 듯이 묘사된 이 글은 어딘가 꾸밈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애국심이 투철한 군인 출신이거나 군인 가족일 것이다. 그 혹은 약간의 그들이 건전한 사회 선진 사회를 대변할까? 역사적으로 보면 군인의 시작은 용병이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자들이다. 폭력이 기본인 자들이다. 심한가? 무력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전쟁에서도 전쟁을 하는 군인이 있고 전쟁에 동원된 군인이 있다. 그리고 전쟁에 동원된 군인들을 승리를 위해 싸우게 하기 위해 예로부터 많은 이론들이 만들어졌고  행해졌다. 현대에 들어서는 애국심이 당근이고 애국심이 채찍이 되었다.

 

어느 나라나 군대를 양성하는 목적을 국가를 수호하고 국민을 지키는데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군대를 조물락거리는 사람들은 항상 군대를 국가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침략적으로 동원하지 않았던가? 전후 일본이 그 좋은 예이다. 전후 반세기가 넘도록 자위대였다. 정말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수호하기 위한 국대였다. 그런 자위가 광의로 해석되고 예방적 자위 차원의 공격을 위한 군대로 지금은 탈바꿈했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군인이라도 군대에 포함된 군인은 군대의 속성에 의해 지배되기 마련이다. 그런 군대의 일 개인인 마를 일등상사가 왜 선진사회와 건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논조의 미담에 활용되는가? 이 기사를 미국에서 먼저 다뤘다면 의도 없이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참전 용사에 대한 긍정적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고양시켜야할 필요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전쟁을 위한 원거리 포석일지 누가 알겠는가? 조선일보는 이 미담의 의도를 먼저 읽고 논자의 의도에 맞는 미담을 구할 것을 종용해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군인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본분을 다하는 군인을 나는 물론 존경한다. 그러나 명령과 복종의 미덕을 숭상하는 군대라는 조직의 불특장한 한 인물이 건전사회, 선진 사회, 살맛나는 사회에 한 단면을 나타내는 미담의 소재로 쓰인 글을 이런식으로 재생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건전사회, 선진 사회, 살맛나는 사회는 오히려 군인이 필요없는 사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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