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습작
>
1. 열린 가을로
오늘은 마음을 열리라.
세상과 사람과
아우성과 소리 없는 침묵들에게
내
온 마음을 열리라.
도둑이 남긴 발자국 마냥
계절이 소리 없이 시간의 언덕을 넘나들며
세상에 지친
내
무딘 감각마저 가져가더라도,
신록이 색 바랜 풍경 속에서
변해버린 푸르름만이 나를 대할 지라도
내
아직 젊은 피에 대한 욕망의 끝을 보듬으며
세상과 사람과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가면 쓴 침묵들에게
이유 있는 침묵과 준비된 함성으로
온
마음을 열리라.
2. 가을 소리
올
가을엔 귀 기울이리라.
햇살이 공기와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잠자리 날개 밑에 튕겨가는 시간의 공명에게
내
온 마음으로 귀 기울이리라.
내
귀가에 취하던 나의 노래는
모래와 속삭이는 파도위로 던져버리고
제
흥에 겨워 던지던
유희의 언어들은
큼지막한 낙엽에 싸서 밟아버리리라.
들어 좋은 사랑의 곡조와
어울러 좋은 삶의 합창들에게
두
손 모은 온 마음으로 귀 기울이리라.
3. 남자의 가을
가을이 남자에게 고독한 건
곁에 없는 첫 사랑의 향수 때문이다.
하늘을 향해 도열한 가로수 아래
지난 계절의 흔적 마냥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는
순서를 알 수 없는 추억들 속에서
문득 스치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의 곡조에
남자는 가을과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남자는 가을에 자신이 가졌던
올
수 없는 사랑의 열정으로
스스로를 연민하며
출처를 알 수 없는 깊은 고독 속으로
잠시 빠져들 뿐이다.
4. 여자들의 편지
가을이 오면 여자는
빛
바랜 편지들을 가슴속에서 꺼내 펼칩니다.
글자도 없는데
보낸 이의 소인도 희미한데
여자는
누가 보낸 편지인지
무슨 말을 썼는지 잘 압니다.
희미한 미소와
아쉬운 한숨과
도둑질한 듯 그리움을 창 너머에 그리고는
거울 앞에 서서
시간을 지우려 화장을 합니다.
가을이 오면 여자는
눈가에 주름만큼
한번 더 편지를 접어둡니다.
5. 가을 유혹
벼
익어 성숙한 들판에
누가
憂愁를 찾을 것이며
쪽
빛 깊어 가는 하늘에
누가 고독을 말할 것인가
또한 어느 여인의 유혹이
이처럼 나를 애타게 할 것인가
붉은 쟁반 같은 석양이
들녘으로 숨으려는 순간
나는 가을은 핑계 삼아
시간을 꼬득이고 있다.
6. 가을 驛舍 앞 풍경
햇살 한 줌 걸칠 곳 없어
부끄러운 나목(裸木)
장기 두는 노인
훈수 두는 노인
아무 거침없이
잠을 자는 노인
그리고 노숙자들
어린 아이 장난에 하늘로 솟는
비둘기 날개 아래
노란 단풍이
조용한 빛을 발하는 오후
길어지는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바쁘다.
7. 가을 노래
보름달이 초겨울 찬 기운에
시린 얼굴을 하고
세운 옷깃 만큼
움츠린 모가지를 한 인영들이
무심한 창 밖의 풍경을 연출하는 밤
계절병처럼 앓던 가을도
일상을 찾아 달력을 넘는다.
문득 숨어있던 추억의 끝자락으로부터
속삭이는 이명
어느덧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
우연히 추억을 마주한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내
언어의 자유와 구속은
당신을 향한 내 노래에서 시작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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