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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의 도마일기

기도, 대화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다

간증이 있는 삶3.-  기도, 대화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이 나는 모임에
참석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도
항상 허기가 지는 것은 기도이다.
항상 나만 말하고 나만 구하고 답은 구하지 못한다.
음성이 아니라도 보다 직접적으로 응답받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그 욕심의 레이다에 걸린 것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단지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송 채널을 운영하신다고 하니까,
지인으로 부터 성경으로 부터 혹은 간증서나
사람과의 대화로 부터 어떤 느낌을 받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라고 표현하기는 아직 거북살스럽다.

내 자신 신비적 체험을 원하는지 모른다. 아니 매우 강하다 할 것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나는 논리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범주의 밖에 있는 많은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어떤식으로든 수긍해야만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들은 논리와 합리성을 벗어난 것이 많다.
 그래서 신비적인 체험으로 깨어지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신비적 체험도 까다롭다.
(그저 음성으로 들려주세요를 3일 작정으로 해볼까?)

회개가 있어야한다고한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한다고 한다.
순종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고 한다.
(바울은 길가다 눈멀었다는데...)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간에 메시지의 오고가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해서 듣는 사람이 반드시 말로 응대하지는 않는다.
무형의 언어도 있는 법이다.
기도를 대화로 생각하면 말은 말로 맞장구가 쳐져야겠지만
기도가 커뮤니케이션이라면 구지 그리 조급할 이유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응답하고 계신다는 체험들은 조금 있지 않은가?
말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 우연히 읽은 유명한 목사님의 책 속에서 발견될 때나
아내가 교회와 관련된 일과 사람들에 대해 자문을 구할 때
내가 해 준 이야기를 응답으로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그것이 곧 내게 주시는 응답인 것이다. " 바로 보고 있구나~ 인제는 행동도 좀 해라~"

 

 

사람에 따라 배우는 스타일이 조금씩 틀리다고 한다.

읽으면서 배우는 사람,
쓰면서 배우는 사람,
말하면서 배우는 사람,
들으면서 배우는 사람
그리고 느끼면서 배우는 사람이다.

아마 책을 보면 졸려도 이야기하면서 깨닫고 배우는 것이 훨씬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위의 다섯가지를 다 조금씩하지만 쓰면서 많이 배운다.
또한 말하면서도 많이 배운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다. 들어주시는 것만 해도 어딘가?
듣다가 답답하시면 이야기 하실꺼다.
능력은 없는데 욕심은 많은 내게
말하기나 잘 준비하라고 그저 들어주시니 그 또한 고마울 따름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