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5월 미국 켄터키 주 나이트클럽에서 화재가 발생해 400명이 죽고 130명이 부상당하는
끔찍한 대형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큰 화재가 아닌데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냈는지
그 원인을 찾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 화재 원인은 누전에 의한 것임을 조사 결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전에 의한 화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낼 수 있었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또한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 해갔습니다.
화재가 났으면 사람들은 대피를 하였을 것이고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 건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을
것인데 그 안에 있던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그 사고 현장에서 살아 나온 종업원에 의해 그 화재 사고에는
또 다른 웃지 못 할 이유가 있었음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부엌에서 주방장이 과도하게 전력을 사용하다 그만 전선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커다란 홀에서는 유명한 코미디언이 나와서 재미있는 쇼를 하고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식사와 함께 그 쇼를 보며 박장대소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화재 사실을 종업원은 사회자에게 알려 주었고 사회자는 그 다급한 사실을 코미디언에게
알렸습니다. 코미디언은 코미디를 중단하고 손님들에게 화재가 났으니 조심해서 대피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손님들은 코미디언이 자기들을 위하여 쇼를 아주 그럴듯하게 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조명이 꺼지고 퀴퀴한 냄새가 나며 연기가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일부러 모든 조명을 끄고,
매운 연기를 만들어 내고, 무대 위에서 난리를 피우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결국 실제 상황을 코미디언이 쇼를 하는 줄만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순식간에 죽음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실제 상황임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코미디언의 잘못일까요?
쇼라고 생각한 관객들의 잘못일까요?
고정관념과 자신의 지식에 대한 과신 혹은 선입관이 낳은 불상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코미디언이하는 이야기는 쇼 일것이다'라는 대부분 관객들의 고정 관념과 '우발적 상황을 도입해서
새로운 쇼를 시도하는구나'라는 나름의 지식 범위 내에서의 해석, 그리고 공연장에서의 모든 상황은
공연의 소도구로 활용된다는 선입관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지 않았을까요?
그 코미디언은 대피하지 않는 관객들에게 이건 정말 쇼가 아니라고 실제 상황이라고 황당한 표정으로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 진지함을 웃음으로 응답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누가 이야기를 전하든지 화재라는 말에 대피를 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디오
방송에서 조지 오웬의 소설 화성침공을 드라마가 엮어 방송하는 상황에 많은 미국인들이 실제 상황으로
오인하고 대피 소동을 겪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메스 미디어에 의한 충격적 사건의 진실에 대해 이미
사람들은 학습의 기회가 있었고, 1977년대의 미국은 이미 TV나 영화 쇼 비지니스에 대한 정보가 일반
에게 많이 공표된 상황이었던지라 관객들은 스스로 양치기 소년을 심판하는 이웃 사람들이 되어
있었고 , 우화와는 달리 양치기 소년이 피해를 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아이러니가
연출된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란 것이 이렇듯 재미있는 것입니다.
모두들 진실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진실은 어떤 이유에서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거나 어쩔수 없는
이유로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진실 아닌 진실이 진실인양 세상을 떠돕니다.
정보가 많아지고 전보의 진위를 판단 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은 요즘에도 실제 사실은 그에 관여된
입장이 다른 당사자들에 의해 해석이 달라지게 됩니다.
아프칸 탈레반 납치 사실이 보도되었을때 우리 정부에서는 가기 전에 말렸으니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식의 보도를 흘려 보냈고,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이 유서쓰고 갔으니 그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네티즌의
의견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샘물 교회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웹에 게재된 사진에 보면 출발하기 전 공황에서 안내된 아프간에서 외국인 납치를 시도한다는
정보가 있으니 아프칸 지역 여행을 삼가해 달라는 공고문 앞에서 웃는 모습으로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국가에서의 권고를 무시하고 아프칸으로 갔으며, 이런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을까요?'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다' 라는 앞에서 언급한 관객의 입장이었기
때문일까요? 선한 목적으로 선교를 떠나니 안전을 지켜달라고 기도로 준비하고 출발전 그들 역시
안전을 위한 기도와 성령의 동행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를 배반한 하나님은 잘못된 신일까요?
자기 자녀를 죽음으로 내모는 신,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전지 전능의 신이기에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일텐데 왜 그랬을까요? 그러면 신은 없는 것일까요? 그저 우연적 사건으로만 봐야할까요?
이런 생각들이 요즘의 저를 괴롭힙니다.
창조주의 역사를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하기는 힘이 듭니다.그리고 사건을 통해 더 큰 사건을 예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우리 젊은이들의 죽음이 어떤 역사적 사전의 계기가 될지 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이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이것 마저도 저의 단견일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출근길에 들은 "정말 이제는 미국이 나서야할 차례입니다"라는 라디오 진행자의 말에 꼭지가
팍 돌아버린 시끄러비, 이렇게 글로 풀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곰곰 이 문제가 앞으로 낳을 또다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억류된 우리 국민을 우리 정부가 구출하고 지켜내야하는데 현재 그럴 수 있는 상황과 입장이 아니라는
복합적인 관계가 얽혀 있어서 죽어 나가는 우리 국민을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상황적 문제점이고, 자국민의 희생을 막지 못한 문제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는 후차적인
문제에 대해 아주 다양한 '입장 당사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무장세력에게 납치되었고, 국가는 국민을 수호해야하는 의무를 지닌 실체인데
그 실체는 자기 입장을 가진 또 다른 국민이라는 개인의 집합 혹은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집단
으로 인수분해된다는 것입니다. 집합적 책임을 물을 수는 있으나 집합적 책임은 개인적 책임으로
상쇄하되는 행태나 관행이 세상 어디에건 편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들, 어쩌면 부조리의 존재에
대한 의식적 용인이 개인적 책임으로 애듭이 지어진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을 묻지 않고 우리를 망각
이라는 편리한 합리화 수단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계적인 뉴스 메이커 한국,
탈레반 사건, 그리고 종군 위안부 사건의 미 하원 통과 , 말로 위신을 깍은 세계의 대통령 순위에
올라 있는 노씨. 벌써 잊혀져 가지만 미국의 한 대학에서 총으로 사람을 난사한 한국인, 오만원짜리
바지 세탁 대문에 750억원 소송을 당했던 한국인... 이 사건들은 지향점을 가진 움직임들일까요?
만약 지향점이 있다면 제가 처해져 있는 이 상황들과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은 어디를 향해가는 것일까요? 결국 죽음인데 죽음 조차도 부정하고 죽음 후의
삶의 공간을 천당이니 지옥이니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중천이니 하며 마련해 놓은 우리 인간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지도 못하면서 왜 이런 안전 장치들을 도처에 마련하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마음을 비우지 못한 시끄러비의 아침 넋두리가 너무 길었네요?
좋은 하루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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