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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용서이야기]

 

[용서이야기]

: 데이비드 스툽 지음 / 예수전도단 출판

 

1.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유는 피해 입은 사람이 등가의 피해를 되돌리는 것을 포기하는 불공평 때문이다.

 

2. 용서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 다른 사람에게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도덕적 기반을 흔드는 죄를 범하거나

  - 그런 죄의 대상이 ''이거나

  - 내가 진심으로 신뢰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이 확인될 경우.

 

3.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 스스로 분노에 함몰되기 때문이며

 - 분노에 대한 매듭으로 복수를 취하기 때문이며

 - 복수는 또 다른 복수로 악순환되기 때문이다.

 

4. 용서란?

 

 - 容恕 는 얼굴 표정을 마음과 같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해를 입거나 상처를 받은 자가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존재 즉 자연의 마음 창조주의 마음이다.그 마음에는 분노의 순간이 아니라

   사랑의 궁극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음 심()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물 수()자룰

   닮아 있다.  존재하지만 정해진 모양이 없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생겨나서

   끊임없이 흐르고 정해진 모양은 없어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지며, 작은 모습으로는

   가치 없이 보이지만  뭉치고 합쳐지면 태산도 움직이는 힘을 가진 것 등등

   이같이 우리는 물의 성질을 닮은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배워야 한다.

   물길을 가로막으면 때론 돌아가고 때론 광폭한 힘으로 그를 넘어서도 간다.

   그러나 물은 항상 평정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이 평정심의 마음을 그 인격의 거울인 얼굴에 표현하는 것이다.

   상처를 극복한 진정 어린 눈길과 복수를 이긴 미소와 사랑을 전하는 말이 담긴 얼굴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용서인 것이다.

 

- Forgive는 그저 준다는 의미다. 그를 위해(For)  그에게(For= to) 준다는 것이다.

  영어를 영어답게 하는 동사 세가지를 들라면 Be Do  Love이다.

  이는 존재(Be)와 존재의 행위(Do)와 그 행위의 방향(Love)을 이르는 것이다.

  사람이 창조된 이유도 사랑하기 위해서 이며, 가장 가치 있는 행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을 주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데 복수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5. 용서의 유익

 

 - 용서는 매임으로부터의 풀림이다. 복수는 집념을 요구하여 끊임없이 분노의 감정

   속에 사람을 옭아맨다. 분노의 감정은 항상 과거에 그 구심점이 있기 때문에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방해한다. 분노에는 오직 복수의 순간만이 미래에 존재한다.

   삶의 다양한 가치가 하나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매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면 그 인생에는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가 자유이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속박으로부터

   풀어진 상태이다. 분노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곧 용서인 것이다.

 

 - 용서받은 자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라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용서 받은 자를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새롭게

    용서할 수 있는 자를 만드는 기초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용서가 없다면 피의 복수로

    얼룩진 끔찍한 모습의 지옥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 용서는 승리의 감정이다.

   어떤 이는 용서를 힘없는 자의 나약한 선택이라 생각하여 자기를 비하하거나

   용서가 필요한 어떤 사건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감정적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여

   우울증 등의 정신적인 병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분노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고양시켜준다.

   용서한다는 것은 권리의 선택이지 의무의 부여가 아니다.

   용서할 수 있는 권리의 행사는 그 삶이 주도적인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6. 용서에 대한 오해들

 

 - 용서란 잊기 위한 것이다?

    아니다. 용서는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용서한 자는 용서한 것을 기억하고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불쾌한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

    또한 용서받은 자는 최소한 그 용서를 기억해야 한다.

    용서 받은 자가 그 용서를 망각한다면 용서의 의미는 대승적 차원의 자기 인격의

    고양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람 사리의 촉매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용서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아니다. 용서는 그저 좋은 사람으로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만이

   아니다. 용서를 하는 순간에는 자신도 그 마음에 매인 것을 풀어야 한다.

   성자나 성인의 고매한 인격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

   화를 내는 이유가 용서하기 위한 것이란 것을 분명이 알고 있다면, 용서 받는 자도

   그 화의 의미가 오히려 고마울 것이다.

   

 - 용서는 빠를 수록 좋다?

    아니다. 용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그 과정은 사람에 따라 필요한 시간이 다른 법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종종 그 자리에서 사과한다. 그 사과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사과를 하여 용서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를 오히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그 인격을 폄하하기도 한다. 진정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그가 용서할 때 까지 기다려야

    옳은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먼저 스스로 용서하는 것이지만 때론 상대방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준비되는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서 에덴동산의 사건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진 그 기 시간을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용서는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면 이루어진다?

     아니다. 상처가 아문다는 것은 많은 시간 동안 잊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그것이 기억되면 그 분노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분노가 살아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상처를 가진 채로 그저 눈감아 주고 시간이 약이라 여기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

     악한 행위를 눈 감아 주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빚진 자에게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지 그 악한 행위를 용인하는 선한 행위가 아니다.

     마땅히 빚진 자는 그 빚이 탕감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나 그것을 강요하는 것

     또한 용서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 빚을 받아내야 한다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그 출발 선상에

용서가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뉘우쳐야만 용서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전히 그 상대방에

매여있는 것이다.

 

   - 용서하면 화해해야 한다?

      아니다. 용서했다고 아무일 없는 듯이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기 까지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용서를 화해와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용서는 나의 몫이다. 그러나 화해는 쌍방의 몫이다. 용서를 한 상대방이 뉘우친다면   

     화해를 하기 쉬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용서했는데 화해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을 나무라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일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용서를 하고 정말

     자기 인생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        

     화해는 용서의 기억보다 분노의 기억에 대한 숨은 인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용서는 필수이지만 화해는 선택이다. 

 

 - 용서는 나의 감정을 이성으로 극복해야 하는 괴로운 과정이다?

   아니다.

   용서를 분노의 감정을 이성으로 억압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분명히 괴로움이 있다.

    그러나 용서는 자유로움과 평안의 감정으로 분노의 감정을 배출하는 것이지, 그저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용서하고 마음은 용서되지 않으면 그는

    용서를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용서는 이성적 판단과 합일된 자유의 느낌이며 감정이다. 그것은 괴로운 과정이

    아니라 행복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창조의 과정이다.

    창조는 힘들고 괴로운 과정이라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창조가 주는 기쁨을 얻는

    과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떤가?

   

 

 - 용서는 스스로 용서가 필요한 상황을 책임지는 행위이다?

    아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받을 사람의 잘못과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분명 책임은 상대방에 있는데도 " 그 때 내가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하며

    스스로 죄를 덮어쓰고 용서를 의무화하려 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또래 보다 약하고 힘이 없다고 해서 힘센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한다면, 반대로 내가 힘이 세다면 다른 아이를 괴롭혀도 좋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용서는 책임의 소재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빚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네게 있기 때문에 탕감해주는 것이 용서라는 것을 기억하라.

 

7. 용서하는 법

 

 - 우선 자기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유다와 베드로는 누구나 다 잘 알 것이다. 유다는 목을 매어 자살했고,

   베드로는 눈물로 뉘우치고 예수의 제자 중 큰사람의 몫을 담당했다.

   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자기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자가

   남을 용서할 수 있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타인에게도 엄격하듯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고

   잘못을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처럼 스스로 용서하는 것은 뉘우침의 과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 감사하라.

    감사는 먼저 받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감사할 상황이 만들어 진다.

    그런 경험을 통해 배움과 깨달음을 얻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라.

    그렇다고 자식을 죽인 강도에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잃는 슬픔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정할 수 있다면 그 사건 자체를

    감사하라. 그리고 그 강도를 용서하고 그 용서를 통해 나의 아픔이 다른 이의 기쁨이

    될 것을 믿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