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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잡생각들

풍경 읽기

 

[ 풍경 읽기]

 

서울을 오르내릴 때 자유석을 단골로 이용한다. 중간 마주 보는 좌석의 매력 때문이다.

자리를 차지하고 앞으로 다리를 쭉 뻗고 있으면, 차에 사람이 차지 않는 이상 마주 보는

네 좌석을 독차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부지런하면 특실보다 나은 편안함을 만끽하며 여행을 할 수 있다.

잠을 자기도 편하고 책을 읽기도 편하고 때론 일을 하기도 편하다.

이런 편안함 외에도 또 한가지 장점은 창 밖 풍경을 골라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주어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골라 않는 자유가 있다. 그래서 좋다.

올라갈 때는 낙동강 쪽을 바라보는 창가에서, 내려 올 때는 동쪽의 너른 벌판과 비교적 한가로워 보이는

농촌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창가를 택한다. 잠이 부족한 경우가 아니면 창가 자리는 언제나 풍성한 상념과

생각거리들을 제공해 준다. 그냥 존재하면서 때에 따라 변할 뿐인 창 밖 풍경을 통해 내 생각은

여러 가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고는 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창 밖 보기를 풍경 읽기라고 이름 지었다.

 

풍경 읽기의 핵심은 나의 심상에 다가오는 풍경을 읽는 것이다. 수많은 이미지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키워드를 찾고 문맥을 찾듯이 그저 열린 마음으로 창 밖을 응시하다 보면

이런 저런 상념들이 창 밖 풍경과 함께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면 종이를 꺼내 메모를 하고 생각을 풀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러 문장이 뭉쳐지게 되고 이것을 나중에 시간을 내서 글로 풀어낸다.

대게는 독백조의 글들이라 쓴 글을 아내에게 보여 부면 어렵다고 핀잔을 준다.

난 쉬운데 또 어렵단다~ 하면서 내 글을 읽어 보면 관념적이기는 하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철학적이라고 표현해달라고 우긴다. 그러면 아내는 곧잘 져 주는 편이다.

 

이번 풍경 읽기도 좀 철학적(?)이다.

 

바야흐로 봄이다. 만물이 소생한다.

강 건너 있다가 어느새 창 옆으로 바짝 다가 선 산 자락에

봄의 소생의 모습들이 가득한데 여기저기 묏자리들이 널려 있다.

소생의 가장자리에 죽은 사람의 묘지가 존재한다.

인간은 소생하지 않는데 그 묘지는 산과 함께 소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묘지를 둘러싼 풀과 나무들 중 어떤 것들은 변화했을 뿐이겠지만,

 어떤 것들은 죽어 스러지기도 했겠고 또 새로운 탄생을 맞이한 것도 있다.

죽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소생해야 한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소생의 관념을 배제하고 나면 ,

인간의 육신은 또 다른 생명의 자양분으로서 공급되어 그 생명의 일부가 되어 있을 터.

 

망원경으로 보면 한 인간의 죽음이란 정말 별 것 아닌 변화이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보면 인간의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잉태라는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생명을 생산하는 것은 그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있는 아주 제한된 축복이다.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 주검은 묻혀 썩어지든 태워 뿌려지든 사람으로서 소생되지는 않지만

또 다른 생명과의 교류가 시작되는 것이다. 단지 물리적인 형태만이 교류하는 걸까?

 

인간의 정신은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첨가하거나 변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의 생각의 결과가 남겨져 있으면 그것이 살아 있는 자나 태어나지도 않은 자들에 의해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 지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생각은 인간의 삶의 가치만큼 인간의 죽음의 가치를 동가(同價)로 만들어 준다.  

그러고 보면 이런 안배는 정말 인간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고 자각할 수 있는 축복이다.

 

꽃봉오리들이 눈에 즐거운 흰색과 분홍색으로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한가지에 매달려 다시 만난 것을 축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탄생을 축복하는지

즐거운 모습들로 비춰진다. 그것이 만남이든 탄생이든 불과 몇 달 전에 잎사귀가

저 나뭇가지들과 이별하는 순간이 없었다면 저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저 꽃들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면 나뭇가지들은 그 잎사귀들을 떨쳐 버릴 수 있었을까?

낙엽이라 칭송 받으며 떨어져야 했던 그 잎사귀들은 그 순간 절망했을까?

비록 순리처럼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까?

마지막 잎새는 최후까지 저항한 것일까? 아니면 끝까지 나뭇가지가 보듬으려 했던 것일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들이 지나가는 동안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라는 안내 방송에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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