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의 위험한 책, 차이말]
니체의 책을 접한 것은 대학 초년 시절,
메케한 최루 가스 냄새 만큼이나, 나의 생각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했던 변증법적 철학과
학생운동의 텍스트로서 자리매김 했던 소위 사회과학이라는 이름 하의 민주란 가면을 쓴
저항 사상의 교본들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김없이 데모가 있던 어느 날
‘남들이 한번 도 이야기 하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아주 당찬 청춘의 ‘야무진 꿈’들이 막걸리가 오가는 술자리를 떠돌았었고,
그것은 칸트적인 이성 비판을 뛰어 넘는 ‘세상을 소위 아래로 보는 무엇’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지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니체나 쇼펜하우어가 교재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또한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당시 대학 사회의 비판정신의 주류라고 일컫던
소위 학생 운동가들의 미숙한 자기 완결성들에 대한 염증이 돋아나던 시기라
나와 뜻을 같이 하던 몇몇 친구들의 기호에는 아주 ‘딱’이었고,
그 책을 들고 캠퍼스 이 구석 저 구석을 다니는 것이 대학의 주류들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 지식이나 삶에 대한 문제 의식은 사회의 드러난 모순에 대한 분노를
막걸리 잔에다 쏟아 붓고 그것을 마시고 토해 내는 정도의 아직은 걸맞지 않은 무엇이었다.
그러나 딸랑 몇 권의 책을 읽고는 무지막지 하게 많은 아는 체를 했었던 것 같고, 소재가
떨어질 때 쯤에는 변증법에 대해 공부하다가 현대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러셀과
비트겐쉬타인 류의 논리 실증주의와 분석 철학을 통해 경험주의 철학의 일부를 비판하는
안주거리를 다시 술판 위에도 올려 놓았던 것 같다.
그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은 ‘꽤 아는 체 하는 놈’이란 비야냥과 ‘말 빨’이라는 별명이었다.
아무튼 20년이 좀 지난 시점에 도서관에서 빌린 난해한 번역서가 아닌
아주 쉽게 잘 요리된 니체를 만난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예전에 골치 아프게 읽었던 기억이 선입관으로 자리 잡을 틈은 저자의 서문을 읽을 때
뿐이었고, 본문으로 들어가서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어지간히 니체를 뜯어 먹고 쓴 책이라 그런지 니체의 이전 저작들에 대한 인용을 통해
‘차이말’(예전에는 ‘짜이말’이었는데 요즘은 ‘차이말’로 다들 쓴다)을 정말 잘 정리했다는
생각을 수 차례 했었다.
니체의 철학사적 위치에 대해 구구절절한 말들이 많지만, 형이 상학의 경계선에서
개인의 자유의지의 실현 방법과 당위성 및 철학과 사회 변화의 동인들에 대한 내재적인 모순을
다른 눈으로 보고 직접 망치질을 하면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화두를 던진 사람이라고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싶다.
니체의 철학을 따른다면 니체에 함몰되어서는 니체를 볼 수 없다. 니체 이후에도 니체와 궤를
달리하는 수많은 사상과 철학들이 쏟아졌고 니체와 함께 요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니체의 철학적 결론들이 담긴 수많은 메타포들은 메타포 본연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메타포와 패러디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내용을 함축하거나 해석의 개연성
혹은 자기적 해석을 통한 자기 생각의 체계를 가질 수 있는 여지를 안배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교조적인 철학이나 사상가들과는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책의 부제에서도 밝혔듯이 니체는 매니아를 위한 작가였다.
책에는 작가가 독자를 선택한다 고도 이야기되었지만 사실 니체는 소수의 매니아들로 인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매니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는 대중에 아부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사상과 관습과 개념들을 위험하리만치 과감히 망치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심 그들 매니아를 통한 대중화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 시대’라는 단서를 붙이지는 않았다.
그는 매니아들에게 니체라는 우상을 깰 것을 주문했고 동시에 자기화한 니체를 요구했다.
그로 인해 후일 니체 연구자들 혹은 니체 추종자들이라 칭해지는 다양한 분야의 후학들을 통해
다양한 학문과 예술의 기저에서 대중 들에게 끊임없는 교신을 보낼 수 있었다.
니체는 자기가 살던 시대에 이미 대중을 위한 씨앗을 심어 두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된 몇몇의 선언적인 문장들, 예를 들면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들은
그의 이름을 대중들의 머리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광고 카피였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니체를 씨앗으로만 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싹이 트고 열매가 맺어봐야 아는데,
니체 스스로 사용한 메타포의 껍질이 너무 단단하기도 했을 뿐아니라 그 씨앗을 품은 토양도
너무 두꺼웠거나 너무 척박 했던 탓에 니체라는 모습을 하고 세상에 드러나기 까지는
1세기가 넘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이다. 니체의 철학도 이런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가 부정의 망치로 깨부순 많은 기존의 관념들은 오늘날의 우리의 DNA에도 각인되어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이 책이 100년 전의 저작임에도 우리의 공감과 새로운 감흥을
주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디오니소스의 모순과 디오니소스적인 모순은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와 모든 관계에서 존재한다.
니체는 인간이 가진 이런 공통점을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랜 과거 속에서 단초를 찾았고
문제의 핵심을 신에 의존적인 인간이 아닌 스스로 자기 가치의 확립을 통해 강제되지 않는
창조적 인간으로의 과정을 길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충실히 읽은 사람은 특정 관점의 틀을 가지는 것이 중력의 영을 거부할 줄 모르는
관습이라 비판할지도 모르지만, 니체적 질문은 철학적 인간으로서 뿐 아니라 실존적 인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그 실천에 대한 명확한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행동하려는 자에게는 정말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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