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양 모든 것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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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교양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그저 교양이란 상식을 의미했고 그 常識이란 그저 잡다한 것을 많이 아는 雜識이 아니라
폭과 깊이가 있는 지식으로써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내게 교양 있는 사람이란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상식에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뜻했다.
흔히 교양인을 문화나 예술에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또 예절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일컫지만
나에게 그것은 왠지 김치찌개엔 놓인 치즈덩어리 같은 느낌이랄까?
교양이란 것이 내겐 불편한 옷 정도라고 생각했었기에 가식적인 행동 양식을 미화하는 단어로서
약간은 거부감이 있는 단어 정도였다.
물론 정말 교양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가식이 없어 보였다.
교양이 몸과 마음에 밴 사람들에게서는 소위 교양미란 것이 느껴진다. 몸에 밴 교양은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에 내게 누가 ‘당신에게 교양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주저 없이 답할 것이다.
‘나는 촌놈이고 나와는 좀 거리가 있는 그 무엇’ 이라고.
이 책은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양의 개념이나 목적, 필요성을
일목요연하게 적은 책은 아니다. 교양에 대한 저자들의 강연과 대답내용을 책으로 엮었기 때문에
‘생각에서 길러진 말’의 모음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글을 쓰기 위해
목차가 정해지고 글과 생각이 서로 뒹굴면서 풀어낸 내용의 전개가 아닌것은 어색하다.
그래서인지 저자들의 생각들이 책의 이 곳 저곳에서 중복되어 표현될 때는 다소 불편한 감도 있다.
그렇지만 강연을 듣듯이 어렵지 않게 넘어가는 책장 속의 내용들은 <교양>이란 열쇳말을 가지고
많은 생각거리와 함께 잘 짜인 논리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제목부터 시작해보자.
< 교양 모든 것의 시작>이란 제목은 이 책을 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교양에 대한 결론을 언급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란 결국 삶이다. 교양이 삶의 출발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교양을 갖추기 전에는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주장일까?
그렇지 않다.
삶은 바로 사람됨을 이야기한다. 사람임이 아니라 사람됨의 삶 말이다.
저자들의 사람됨에 대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요소는 바로 자유다.
교양은 자유로운 삶의 필요조건이며 사람됨의 자양분이라 주장하고 있다.
저자들이 바라본 교양을 갖춘 사람은 우선 생각이 열려 있다.
그들이 선입관이나 편견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것은, 지적 자유의 추구를 위한 노력의 결과
그들이 다름과 차이에 대한 구분이 가능할 정도의 지식과 지적 추론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열린 생각과 더불어 또 다른 교양인의 사고의 특성을 유연성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유연성이란 바로 Cross- Over형의 사고를 말한다. 어떤 영역에 갇혀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의 그들의 교양을 접목할 줄 아는 사고이다. 그래서 교양은 강화된 생각하는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유연성이란 특징이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보는 것’ 등이 가능해지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교양인의 사고의 특성을 하나 더 들자면 바로 휴머니즘적인 사고이다. 같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양의 준거가 없으면 원자탄을 만드는데 그 기술을 이용하지만 교양이 있는 사람은 원자력 발전소를 만드는데
그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샤워실에 가스를 불어넣어 사람을 죽이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스스로 치를 떨어야 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을 고안한 사람들
스스로는 교양이라는 양식을 애용은 했지만 교양을 함양하지 못했기에 그런 비 상식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교양적인 사고의 특성을 이해하고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해서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양심과 양식 있는 행동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책을 곰곰이 들여다 보면 이런 교양에 대한 정의와 아울러 저자들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현대’이다.
즉 "현대의 교양이란 무엇인가?"가가 바로 문제의 제기의 핵심이며 교양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시도가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저자들은 ‘현대’를 위기의 시대, 지성과 이성과 인간성과 도덕성이 위협받는 시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책에는 미국의 911 사태가 인문교양이 패배한 때문이라는
후에 동의한 이유들이 설명되어 있다. 심지어 교양이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정보의 양과 정보 주권의 확산이 교양의 기회를 넓혀준다고 가정한다면
사실 교양은 지금처럼 득세한 적이 없을 것이다.
교양이 지식을 향유하는 소수 신분계층의 전유물이란 오명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정보 활용의 주권이
교육의 발달이나 인터넷 등의 기술 발달에 기인하여 많은 일반 대중에게 넘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교양의 기회는 넓어 졌을지언정 과연 ‘현대’는 교양이 확산 되었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에 대한 답으로 학력을 끌어 들이고 있다.
물론 현대는 이제까지의 지구 역사상 학력이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 학력이란 것이 사지선다형 문제 풀이에 익숙한 정도라고 반론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학력이란 것이 어떻게 생존과 신분상승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학력의 현대에 이런 기능을 하기 때문에 업적을 수치화 하고 단기 평가에 의존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 결국 직업적인 지식 교육이 강조되고 그 결과 휴머니즘의 주체인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의 상실을 야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 인간은 시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는 전제 아래,
인간을 기계화 시키고 야만화시키는 교육적인 드라이브에 대한 제동을 걸자고 한다.
그것은 바로 인문 교양을 재생하고 부활시켜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문교양을 재생하고 부활하는 방법은 교육이 상당히 중요한 수단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교양을 형식적인 매너리즘의 범주에 두지 않고, 교양이란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 자유를 추구하는 자의 학문”으로 재 정의 되고, 지식이 아니라 지성을 전반적으로 확충하고 다듬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배움 자체를 위해 배우는 것이 필요하며 그런 행위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길러 낼 수 있는 교육을 하자고 한다.
그래서 왜 공부하는가? 배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때
‘잘살기 위해서’ ‘ 남보다 잘살기 위해서’ ‘ 남들이 안 하는 것을 배워서’ 라는 답변 대신에
‘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 배움 그 자체를 위해서’ ‘ 교양과 기술을 함께”라는 답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교양은 ‘자유인’이라는 인간상을 목표로 두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다. .
이러한 자유인은 자기 자신의 지식과 교양으로 올바른 판단이 가능한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유로운 능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자유인’으로 키우지 않으면 싹을 틔울 수 없다.
그래서 저자들은 리버럴하게 키워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리버럴하다는 것은 관용적이면서도 정통적 신념(관습/ 고정관념)에 속박당하지 않고
늘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미래를 내다보는 자세라고 말한다..
또한 교양은 삶의 과정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빌둥’으로서의 교양이라 표현하고 있다.
즉 학습과 지식의 축적 과정을 통해 인격을 형성해 가는 것, 개성 있는 인간이 자아를 형성해 가는 것.
인간의 육체적 외양적 성숙과 더불어 정신과 내면도 함께 성숙하는 것을 교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저자들이 주장하는 인문교양을 재생하고 부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들은 교양에 대한 시각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실용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교양은 경쟁 주의 사회 혹은 단기성과 중시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에 익숙한 개인이 무인도에 표류하였을 경우
그가 스스로 생존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가 가진 생존의 기술은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교양을 고전으로만 바라보는 시각, 교양은 진보하지 않는다라는 시각을 수정해 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교양은 ‘과거에 빗대어 어떻게 해야 하는 당위성’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냐”는 당위성의 문제이므로
지식과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고 진보함에 따라 교양도 변화한다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즉 교양은 일정한 문화와 사상을 체득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이 익힌 창조적 이해력과 지혜이며,
그 내용은 시대와 민족의 문화와 이념의 변화에 호응하며 달라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가 정보의 흐름과 세류에 민감한 시각을, 인간 본연의 모습과 자유롭고 조화롭고 의미 있고, 행복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충실한 시각으로의 수정을 요구한다.
저자들은 이런 문제가 고등 교육의 대중화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교양이란 관점에서 보면 고등교육이 경쟁의 강도를 강화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한 편향성을
갖게 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즉 교양은 다양한 과실이 열리는 다모작의 나무인데 고등 교육이란 것이 그 나무에 거름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일모작의 작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등교육이 정보 주권을 대중에게 돌려 주는 동시에
교양을 쌓을 기회의 균등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등 교육이 “올바른 목적을 선택하고 추구할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교양을 재생하고 부활하는 방법론으로 상세한 이야기가 좀더 거론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저자들은 그 대안을 자유와 상상력과 차별적 시선의 탈피라는 세가지 열쇳말로 요약하고 있다.
특히 문학을 통해 정신적 내면성의 자유와 타자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에 대한 그 동안의 나의 편협한 사고에 경종을 울리기 충분한 문장이었다.
또한 저자들은 교양의 필요성에 대해 사회 제도에 까지 그 사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민주주의는 지식과 기술의 기반이 아닌 상상력의 해방을 통한 교양의 재생을 통해 이어진다고 보고,
기술적 합리주의가 반복되는 동일한 현상에 기초하므로 대중의 일반성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을 통해 민주주의가 이루어짐을 간과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예로 든 것이 일본의 소수의견의 배제를 통한 만장일치 제도인 무라하찌부이다.
무라하찌부는 이견의 배제를 통해 만장일치라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다소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수단은 민주적인 절차라는 혹은 제도라는 이름 하에 다수의 폭력으로서 민주적인 사회든 비민주적인 사회든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교양에 대한 사르트르의 원칙을 인용해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찾고자 한다.
사르트르는 역사, 사회, 인간의 현실을 이해(교양)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나가 전체를 크게 조망한 객관적 틀이다. 내 것, 내가 아는 것이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이나 제도는 분명 어떤 경계 안에 있고,
우리는 이런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유롭고 유연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개인은 개인 그 자체가 자기 목적적이며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키워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자신을 좀더 면밀히 알고 싶고, 더 깊이 사고 하고 싶은 욕구를 통해 충실하게 배우고,
다시 그 배움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 지성이 추구하는 보편적 善에 있어서의 다양한 접근법에 대해 인정하는 자세일 것이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원칙을 한 문장으로 만들자면
‘교양은 세상 속에서 내가 처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며
이는 역사적 자아의 발견과 객관적 자기 관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문교양을 재생하고 부활하는 방법론에 이어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서 이미 많이 암시되고
제시된 것이지만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지에 대해 살펴보자.
책에서 제시된 교양(인)의 특성에 관한 대목이 바로 그 해답일 것이다.
즉 교양인의 특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면 유리는 교양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첫째가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실 인간 지성사의 모든 동력은 바로 이 호기심에 있다. 호기심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지성은 정말
멈춰진 시계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 이 호기심의 기준은 나와 너와 세상에 대한 것에 출발할 것이며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 것이다.
따라서 교양은 실용과 업적과 과학과 기술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 호기심으로 인해 서로가 묶여질 것이다.
둘째가 타자 지향적 자세이다.
이는 주관과 객관의 조화이며 통합적이고 동시적인 시각이다.
세상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그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교양이다.
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나의 주장 보다 남에 대한 배려가 종국에 가서 승리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타자지향적 자세는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양에 대한 가르침이다.
셋째가 문제의 제기이다.
세상은 분명 문제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그들이 편리한 쪽에 두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인류 역사가 적어도 진보한다는 가정에 동의 한다면 그 많은 진보들은 문제를 문제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 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비록 외로운 소수가 된다고 할지라도 교양인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강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넷째가 새로운 보편성의 구축을 시도한다.
즉 교양인은 과거 지향적 인간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 인간상이며, 치열한 현실주의자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현실을 도외시 해서는 결코 새로운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교양이 교양주의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실용주의나 성과주의에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새로운 보편성의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쌓는 교양이 나 혹은 나와 같은 부류를 구분 짓는 편협한 수단이라고 느껴질 때면
우리는 과감히 그 교양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를 아우르는 것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모색해야
바른 교양, 바른 교양인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가져본다.
교양은 인간 삶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 답을 줄 수 있을까?
만약 그 핵심 문제들이란 것이
who are you? (나는 혹은 우리는 누구이며)
Where are you come from?( 나는 혹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Where are you going?( 나는 혹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것이라면
리버럴한 빌둥의 교양은 분명 어느 정도의 해법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인간이 그 주어진 시간 동안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하다가 마는 것일지라도,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부단히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며,그것이 곧 휴머니즘이며,
인간다움을 위해 지식과 교양은 너무나 소중한 삶의 숙제이자 자양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 읽은 소감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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