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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 만들어진 신]

 

[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 김영사 출간

 

우선 '만들어진 신'이란 제목의 번역 자체가 파격적이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자면 'The God delusion' 신에 대한 망상 정도로

번역된다. 하지만 책을 읽어 가다 보면 적절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의견을 따르자면 신이 있다면 태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진화의 결과로서

최후에 존재하게 되는 무엇이다. 그러나 그가 보는 관점에서 신은 없다.그는 인간의 종교적

망상이 신을 만들어 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진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진화한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뿐 아니라 군집 생활의 습성에 기인하여 사회적 역사적 진화를

거듭함으로써 신이 없다는 '사실' 하에서도 균형 잡히고,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존재로서 살수 있기 때문에 현재 종교가 주는 망상의 근원인 신을 없애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로 인해 인류 사회의 폭력과 부패와 병폐가

만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화의 산물인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과학적인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과학적 근거들을 탐구해 간다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고 인간은 

사회 진화의 산물인 도덕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분쟁 없이 화합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의 흐름을 요약하자면 종교의 폐해로부터 탈피해야만 반 인륜적인 전쟁과 갈등과

반목이 사라지며, 이들 종교적 폐해는 종교를 이용한 지배층의 인간들에 의해 조장되어

왔으며,이러한 망상적 폐단을 없애는 근본적인 방법이 신이 없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분명 논란의 여지를 만들어 내었고 논란의 한 축이면서 그 자체가 논란의 한 장() 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정리된 논란을 정리해보자.

 

그 첫째가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란.  ,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란이다.

 

둘째로 신과 인간간의 창조에 관한 논란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지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셋째는 신학의 과학적 접근과 과학의 신학적 접근의 논란이다.

여기서는 성경의 기록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의 제시 노력과 진화에 대한 증거 불충분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증거가 있을 것이니 믿으라는 신학적 접근이 상충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종교의 폐단은 상당 부분 수긍이 간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모순들이 종교로 인해 발생되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문제이다. 어떤 형식과 제도로서 규율 되는 종교는

신적 계시라기 보다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종교로 인해 발생된 대부분의 문제는 정말 종교 때문에 발생한 전쟁이 아니라

그 내면에는 자원의 획득, 영토의 확장 등 정치적이고 개인의 야욕 같은 것이 숨어 있다.

도킨스도 그 점에 대해 지적했다.

결국 그것들은 종교를 오용한 결과이며, 오용의 책임은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종교의 본질에 신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는 종교의 폐단을

신의 존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가야 하는 도킨스의 논리적 흐름은 어딘가에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의 문제는 철저히 개인적인 체험의 문제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신은 본질적으로 논리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므로 논리적 증명만이 사실 인정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을 증명해 보일 수 없다.

그러나 신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 혹은 공동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경험을 한 것을

우리는 안다. 존재에 대한 확인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도킨스가 종교의 악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선한 양심을 가진 지식인인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 역시 과학적 탐구와 도덕적인 규범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현상과

신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어찌 생화학적인 물질대사로 설명하겠는가?

어떤 생각과 외부 자극의 결과로 호로몬의 분비가 발생하고 그 호로몬이 어떻게 어떤

작용을 하는 지는 우리가 알 수 있지만, 또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는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해석은 할 수 있지만 그 본질적인 원인은 규명이 불가능한 문제가 아닐까?

인간의 사유와 감정이 뇌 속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실체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는 것이라고도 주장될 수 있다. 어떤 감정을 표출하는데 필요한 물질이 존재한다.

그 물질을 인위적으로 투입했을 때 우리의 감정이 변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감정의 근원을 외부 자극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꿈에서의 자극은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영상의 기온에서도 냉장고에 갇혀 있다는 믿음 대문에 실제로 동상으로 사망한 사례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가정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뇌에 존재하는 해당 물질로 인해 그런 감정이 표현되는 것이지 인간의 감정의 생성 자체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 해당 물질의 존재 때문에 감정이 생성된다면 우리 몸에서 그

물질을 생성하게 하는 끊임없는 외부 자극에 대해 항상 동일한 반응이 있어야 함에도

동일한 자극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것도 물질 때문인가?

경험이라는 정보 때문이라 설명할 것이다.

경험이라는 정보가 동일하고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자극이 주어진다면 사람은

동일하게 반응할까?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이거나 혹은 유사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는 과학자들도 드물다는 것을 도킨스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의 문제도 본질적으로 원인을 규명하기 힘든 문제이다.

왜냐하면 불가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이 있다 없다거나 혹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거나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거나, 인간의 역할과 신의 역할이 어떻다거나

등등, 사실 어떤 과학자들도, 어떤 신학자들도 실증한 적이 없는 문제를 이분법적이거나

양비론적 관점에서 생각한다. 엄밀히 보자면 어느 쪽이든 길들여진 사고의 단면들 아닌가?.  

 

종교적 신념의 선택은 사회적 혹은 문화적인 강압이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체험은 아주

개별적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신을 선택한다면 결국 자신의 영혼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무신론자의 가장 큰 딜레마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영혼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어지는 것은 단지 지적 능력의 차이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인정하고

아주 소중히 간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또 하나 의구심을 가져 볼만한 것이 있다.

바로 무신론과 진화론의 결합이다.

 

무신론자라고해서 다 진화론자가 아니고 진화론자라고 해서 다 무신론자는 아닐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지 않는 다는 관점에서 무신론은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이론적

근거로서 진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잘못된 뿌리를 잡은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무기물에서 우연히 생성된 유기체에서 세포가 생성되고 그 세포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주어진 환경의 산물로서 각기 다른 모습의 생명체로 진화한다는 것은 다윈이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단편적 사상들의 유사성에서 유추한 이론일 뿐이다.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진화에도 완벽한 증거가 없다.

만약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면 지금 원숭이는 왜 진화하지 못했을까?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원숭이들과 우리 인간들의 차이는 뭍으로 올라온 시간이 차이가 나는 어류

혹은 양서류일까? 그렇다면 원숭이는 언제 인간으로 진화할까?

이 역시 진화론은 화석 연대를 계산해서 추론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인간은 진화의 최종 단계 모습일까? 

진화론자라면 아니다라고 답해야 하며 다음 단계의 진화에 대해서는 모른다, 혹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답변을 해야 한다.  또 다른 불가지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의 근거가 되는 법칙이란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하면서 동일한 실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실이어야 함에도 진화론적 과학자들은 이런 그들 논리의

근거가 되는 과학의 명제 조차 부정하는 오류를 종종 범하고 있다.

진화가 과학이 밝힌 진리 혹은 진실이라면 지금까지의 근거를 통해 앞선 질문들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것이다.

진화는 관찰의 결과이지 실험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화는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이론일 것입니다. 실험이 불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라든지 신적인 현상들에 대한 체험은 오히려 반복적으로 관찰되고 실험되어

지고 있다. 어쩌면 창조론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주장이 더 과학적일지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불가지한 것들에 대한 상상력이 신을 만들기도 하고 진화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신론 즉 불가지한 것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믿음이

과학이란 이름의 전혀 비과학적인 추론과 결합한 것이 이런 ‘만들어진 신’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신앙은 아주 개별적인 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공감으로 인해 전파된다.

그런 체험적 개인들이 많다면, 그것이 종교란 이름과 행위로 형식화 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름'이지 '틀림'이 아니며 존중 받아야 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의심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신학자들은 믿음의 자세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이 대별되는 것이 의심과 믿음이라는 대립적인 단어의 선택 경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심이란 것은 다른 것, 혹은 보여지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믿음의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의심이란 단어는 묘하게도 책임을 회피해가는 구석이 있다.

믿음은 책임을 지지만 의심은 믿음의 다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에 대해 인정만 하면

된다. 과학적 의심은 책임지지 않는 의심이다. 도킨스의 이런 과학적인 신에 대한 의심

혹은 신의 부재(不在)에 대한 믿음도 그런 무책임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도 인정하듯이 현재로서는 불가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말이다.

 

한편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성적 진화의 주장이 신앙적 퇴화를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신앙의 진화가 이성적 퇴화를 요구하지는 말아야 한다. 신이 우리를 창조한 범위 속에는

이런 문제의 해결 능력 조차도 주어졌다고 생각하므로 종교적 망상에 대한 이성의 지적이

결코 창조주의 뜻을 반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했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실증적 믿음)은 이미 의심과 회의를 내포하므로 '진정한'이란 단어가

맹목적인 것으로 호도되지 않는 한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의 믿음'

'믿음에 대한 믿음'이 대상의 진실과 믿음의 허위를 대변해 주지는 않는다.

종교적 기이현상이 착시나 환상 환청을 일으키는 뇌의 작용이라고 한다면 , 우리의 눈과

귀와 뇌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므로 과학이 이야기 하는 '대상' 역시 우리 지식 범위의

진실이지 '진실' 혹은 '참모습' 그 자체가 될 수 없을 수 있다. 불완전한 감각기관으로

확인된 사실들에 근거한 과학도 결국은 착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을 떠나

불가와 도가의 '가함'의 개념에서 보자면 모든 감각적인 진실은 부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믿음이 만들어 내는 우리의 삶을 믿고, 우리의 삶이 만들어 내는 믿음의 결과들에

대해서도 믿는다. 이 믿음은 도덕적 판단 중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이중/3 /다중 구조의 선언적 문장들은 객관이 사실적 증거냐 제3의 주관이냐

객관적이란 이름의 주관 해석이냐 등등의 말장난으로 이어갈 수 있다. 판단 중지 해제하고

나면 도덕적 기준과 이성의 합리성의 기준으로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도덕적 기준이나 이성적 합리성에 의존하기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신을 선택한다기 보다는 신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말이 수긍이 얻기도 한다.

 

나는 신적 환상과 그의 폐단을 지적한 이 논쟁은 나름 효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종교적인 폐단으로부터 벗어나 인류 양심으로 찾고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며 상호 반목이 아니라 협력하여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망상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말과 그 망상의 실체를 사례로서 밝히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으나, 망상의 본질론으로 들어간 것이 그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무신의 관점이 아닌 진화론적 무신의 관점을 선택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종교적 망상은 지금 지구상의 모든 분쟁의 근원인 것도 사실이다.

예수의 시대 역시 이런 종교적 망상의 시대였고 그 후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망상의 기미는 조금도 수그러들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거듭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정확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신’을

혹은 ‘ 스스로 존재하는 신’의 모습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신의 모습에 인간이 덧씌운 망상들이 점점 제거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도

많다는 것을 도킨슨이 전정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종교 혹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믿는 믿음의 순기능에 대해 굳이 도외시 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공감보다 더 많은 저항을

불러 일으킬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보면서 ‘2005년도 상영된 ‘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십자군 전쟁 당시의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두고 싸우는 영화가 생각난다. 어렴풋하지만 종교적 망상에 학습된 사람이었던

주인공이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에서도 신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뇌하다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자살을 한 아내를 떠올리며 이런 대사를 했다. 

“ 당신은 지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 영원이 있어”라고…

(지금이나 당시나 기독교에서는 자살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믿고 있다. 우리 나라도 이와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는 이슬람의 예루살렘 침공에 맞서 성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마침내 협상을 통해 성을 주고 사람을 구한다. 주인공은

종교적 망상을 인간의 선한 양심과 인류애적 화합 의지로 극복했던 것이다.나는 그것이

바로 예수가 가르치려고 했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성육신한 신의 아들 예수는 인간 위에 군림했던

적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예수를 등에 업고 인간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영토와 자원과 부의 획득을 위해 전쟁을 하고 살상을 저질러왔다.

선을 가장한 악이 승리하는 세월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예수의 가르침이 더욱 공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진정 선한 모습으로 선의 편에서 악과 싸우라는 것이다.

그것을 무력을 기르라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우리가 영적 존재임을

(어쩌면 지금의 인간과는 다른 보다 진화된 모습일 것이다.) 알고 선을 행하고 나눔으로써

강해지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천국 사상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죽어서 고통 없는 삶을 영원히 사느니 차라리 이생의 고통을 즐기면서 살다 죽겠다고...

그러나 이는 고통 중독자들이 하는 말이다. 고통이 없다는 것이 삶의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고통 없는 영생이란 것이 재미없는 영생이 아님에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물론 영생에 대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바램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념인 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 사람들은 세계 어느 민족 보다 이 책에 대해 객관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하늘신에 의해 인간으로 진화에 성공한

곰의 자손이며, 더군다나 하늘님의 아들과 결혼한 인간의 자손이다.

창조와 진화가 섞여있고 인격신의 피가 우리에게 흐르기 때문에 인격신의 문제도 그리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연물과 결부된 토템과 신적 대리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무속과 삶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의 불교와 윤리적 인간으로서의 도를 다하는 유교와 ]

자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논리적인 인해를 구하는 도가의 철학을  '현재'의 우리 사유와

감정의 코드 속에 내재된 채 창조주 하나님의 성육신한 아들이 설파한 사랑의 종교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도킨스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모양새로

비치기도 할 것이고 기독교적인 도그마에 대항하는 그의 논리에 찬사를 보내기도 할

것이다.'성경이 무오하다'는 도그마를 깨고 나면 우리만큼 하나님의 이치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민족도 없다. 때문에 나는 이 책도 다양한 입장의 하나로 보고 최대한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하나의 발제로 취급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책을 읽어 보면 도킨스 역시 그의 논리적 도약을 많이 보여주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무신론자들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도킨슨이 말한 것처럼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시적 불가지론이라는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입장은 다르다.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죽음의 순간을 지나면 신의 존재에 대해

체험할 것이다. 아니 적어도 밝혀질 것이다. 물론 유물론적이고 진화론적인 입장에서는

죽은 자의 체험에 대해서는 입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의 이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호흡이 멎고 심장이 멎은 순간에도 얼마 동안 뇌가 살아 있다는 그 과학적 근거의 순간을

우리가 삶으로 해석해야 할지 죽음으로 해석해야 할지 엄정한 기준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에 체험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죽음으로 본다는 사후의 체험이고

삶으로 본다면 살아서의 체험일 것이다. 좀 길게 혹은 공통적으로는 성경에는 말세와 휴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멀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순간이 되면 신의 존재는 입증되거나

부정된다. 그래서 일시적 불가지론에 동의한다.    

 

이 책을 통해 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표현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가 주로 언급한 성격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대한 지적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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