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후감 : 사랑의 기술 ] 에리히프롬 / 문예출판사
책장에서 색 바랜 책을 꺼내 본다.
1982년 춘추각에서 출판된 책이다. 역자만 다를 뿐 번역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책의 맨 뒷장을 펼치니 1984년 9월 학교 앞 헌책방에서 500원이라고 적혀있다.
정가가 1700원인데 지금 새로 산 책값과 비교해보면 그 세월 동안의 물가 상승률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듯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 책을 사게 된 동기가 당시 주체하지 못할 격정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고민을 하던 때였고, <사랑의 기술>이란 책 제목이 눈과 마음을 사로 잡았었기 때문이다.
같은 과의 여학생을 사랑했었기에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터라 이 책이 사랑하는 자의 교본이나 어떤 처방전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이 그런 나의 목적에는 부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밑줄 그어진 것이나
토를 달아놓은 것을 보니 책의 전반부와 후반부에만 조금 있고 나머지는 색만 바랬을 뿐,
비교적 깨끗하니 말이다.
아무튼 25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경험도 나로서는 생소한 경험이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좀 덤덤해진 40중반의 나이에 읽은 이 책은
새로운 감동을 준다. 아마도 당시에는 없거나 부족했던 사랑의 경험들이 풍부해진 탓일까?
52년 전, 에리히 프롬은 아마도 그의 삶과 철학을 기반으로 하나의 담론으로써 ‘사랑’이란
주제를 제시한 것 같다. 사랑이 개인의 삶에 있어서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긍정적 변혁의 모티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 있는 삶에 초점을 두고 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주체적인 개인들이 공존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해 바르게 알고 바르게 행할 수 있어야 하므로 배움과 익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에리히프롬의 주장은 이 책에서 그의 학문적 여정이 반영하면서 아주 설득력 있게
전개되고 있다. 사랑이란 주제어를 가지고 종교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철학적 주장, 정신
분석학적인 주장 그리고 사회심리학적인 근거들이 골고루 안배되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서 원제목
<에리히 프롬의 사랑학 강좌>가 더 어울린다고 보여진다.
사랑에 대한 프롬의 강좌를 요약해보자.
그는 사랑을 인간 정신의 본질의 하나로 규정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 가진 본능적 속성에서 벗어나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본능적 속성으로의 사랑은 자연계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능력으로서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랑의 형태가 이타적인 사랑으로, 직접적이고 접촉적인 관계를 벗어나 추상화된 관계로
나아감으로써 관계를 존재의 본질로 심화하고 외연적 확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가 말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라는 표현은
나와 ‘ 관계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을 포괄한다고 보면 능력으로서의 사랑은 무관한
사람과 대상에 대해 관계를 확대할 수 있는 능력과 상응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사랑을 인간 실존의 본질로 규정하고 있다.
생존의 조건이 물질적인 보급과 자기 보호 능력에 있다면, 실존의 조건은 삶의 의미 발견
능력과 정신적인 교류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을 프롬은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사랑이 속성이 인간의 분리경험의 불안에서 출발했던
어쨌던 합일을 위한 다양한 행위와 활동을 하게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다양한 행위와
활동들이 정신적 유대가 없다면 일시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사랑의 최초의 경험’이나 ‘육체적 욕망에 이끌린 사랑’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실존으로서의 사랑은 일회적이고 감성적인 경험이기 보다는 지속적이고
발전하는 가치적 경험이라는데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가치적 경험의 속성을 지닌 실존의 본질로서의 사랑은 내적 훈련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될 수 있는 것이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사랑할만한 대상에 의해 이끌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개발되어 끊임없이 그 대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며
그 대상의 사랑의 능력을 자극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롬은 책의 서두에서 다소 역설적인 방법으로 배움의 대상으로서의 사랑을 정의했다.
그는 이론의 학습을 통해 사랑이 실존적 본질로서의 보편성에 대해 인식하여야 하고,
실천적 경험을 통해 개별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보편성과 개별성의
합일은 ‘양립의 문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됨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 이상(社會 理想)의 원동력으로 자리잡게 되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내포하고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은 “ 종교와 철학의 역사는 분리 상태의 극복에 대한 대답의 역사이고,
이러한 대답이 한정되는 동시에 다양화되는 역사”라는 문장이나 “ 권력에는 신앙이 없다.
권력에 대한 굴복, 도는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유지하려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 신앙과
권력은 상호 배척한다는 사실 때문에 본래 합리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수립되었던 모든 종교
와 정치체계는 권력에 의지하거나 권력과 결탁할 때 부패하고 갖고 있던 힘을 상실한다.”
는 문장에서 읽을 수 있다. 신앙, 즉 사랑은 우리 역사의 본질이고 그것이 강제적인 힘과
방법으로 사용될 때 오히려 힘을 잃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는 이런 강제적인 힘에 의한 사랑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보호와 책임과 존경이라는
가치와 지식이라는 수단을 강조했다. 특히 존경과 지식에 대한 그의 정의에 공감이 간다.
“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이 아니다.
존경은 어원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하는 능력이다.
존경은 그 사람의 변화를 인정하는 관심이며 착취가 없다는 의미이다”
“ 사랑의 지식은 주변적 관심을 초월해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또한 사랑은 자아도취 상태의 결여, 즉 권력이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겸손과 객관성 같은
태도와 이성적인 태도의 발달을 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롬은 사랑의 본질을 ‘생산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생산적이란 개념을 ‘외부의 영향력에 대한 내적 독립성을 강화하려는 근본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으며, 이는 스스로는 사랑하는 것이 생산적인 삶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의 생산적 본질은 이러한 자기애의 기초 위에
‘교류’를 통해 확대 생산된다. 프롬은 사랑의 생산적 본질은 한 개인이 그를 둘러싼 현실
(모든 상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타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또 다른 교류를 통해
이루어 지며, 이런 교류는 창의적이고 이성적으로 사랑을 행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어찌 보면 이런 그의 정의는 다소 단편적이고 감정이나 감상을 배제한 딱딱한
느낌을 가지게 하지만 그가 말한 ‘창의적’이란 단어 속에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감성이
녹아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은 사랑을 얻기 위한 방법과 전술을 가르치는
지침서가 아니다. 그가 말한 기술은 사랑을 얻기 위한 트릭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원칙을
말하고 있으므로 <사랑학>이라고 봐야 한다. 사랑이 분리에서 합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인간의 행복은 바로 이 합일의 체험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합일의 추구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동일화의 오류’나 ‘ 표준화 경향’으로 인해
인간의 사랑이 몰개성화되고 상품화되는 것에 대한 경고도 깊이 새겨볼 만하다. 또한
진정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고 도취적 합일에 쉽게 몸과 마음을 내던지는 인간의 연약한
속성에 대한 해법으로 자기 통합성을 유지한 합일적 사랑을 제시한 점,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 혹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로 하다’는 성숙한 사랑의
원칙을 제시한 점 등이 이 책을 다시 읽은 감명을 더하는 것들이다.
자식에게 ‘젖과 꿀’을 주고 싶어하는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은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문장은 부모로서의 내 삶의 태도와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章>이라고 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학을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 번 써 본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중략)…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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