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환상의 물매 ]
" 사랑을 관념에 띄워 놓고 돌리다 보면, 사랑은 그 개념을 잃어 갈 수 밖에 없다"
마치 알록달록한 색을 윗면에 파이모양으로 칠한 팽이를 돌리면 새로운 색을 등장하지만
기실 그 색은 개개의 색의 착시에 불과하듯이 말이다.
사랑은 이런 저런 감정과 사건들의 모자이크이다.
만든 이와 보는 이의 입장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사랑이란 주제의 모자이크 말이다.
이 책을 읽은 나의 소감이다.
어려운가?
택도 없는 소리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웃었다. 지금도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쓰는 말이나 글이 어렵다고 하신 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비록 필자는 많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영화 심지어 성과 관련한 시사에 이르기 까지
거기에 포함된 관념적인 개념을 이해했을 지는 모르나, 저자의 눈높이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면 저자는 역시 여러가지가 '어려운' 사람일 것이다.
책의 전반부를 읽어 가면서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쓰는 말이나 글이 어렵다고 하신 분들, 나는 그들이 분노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화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공부는 어렵게 해서 쉽게 풀어야하는데, 난 한참 모자란다고 나를 나무랐었는데...
그리고 관념적인 개념화가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정말 쉽게 설명해주기도 하는데
왜 그것을 이해못하는지... 라고 생각도 했었는데,
에라이! 화가 난다!
중세 철학에서 현대 철학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변증법의 숨은 천재들의 이름까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나는 정말 뭐시기도 모르는 놈이었다.
물매란 단어 부터 어렵게 시작한다.
물매는 물을 넣어가는 맷돌도 되고, 벽에 바르는 물 섞은 흙도 되고 ,
건축에서 쓰는 '기울기'를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환상의 라는 형용사가 붙고 나니 도대체 어떤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의미를 채택해도 문맥상 의미를 가지지만, 저자는 기울기를 본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니 난무하는 외국인 철학자,미학자 등등 철학적 똥물을 튕긴 사람이 169명이다.
인심 많이 써도 60명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의 이야기가 눈이나 생각에 들어올
틈이 있었겠는가?
그래도 꾸욱~ 참고 끝까지 읽어 본다.
단어장을 따로 만들면서까지....
(덕분에 단어장이 풍부해져서 고마운 생각이 든다.)
( 이 책에 있는 지금은 일상에서 거이 쓰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 때문에 화난다기 보다
등장하는 철학자나 미학자의 논리나 사랑의 배경을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읽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종교철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인상 깊은 문구도 눈에 띤다.
그리고 사랑의 각 부분들(우리가 부분으로 나누고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나름의 철학적 정의들은 어렵게 공감을 할 수 있기도 하다.
나중에 저자를 만나면 묻고 싶다.
당신 사랑해본 적 있냐고?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진행했고 어떤 결말을 가졌거나 가져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말도 어렵게 하는 지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 ㅋㅋㅋ)
사랑을 지양하는 지, 지향하는지...
지향한다면 어떤 사랑을 지향하는지...
살(肉)인지 의미(情,心)인지...
결혼을 혐오하는지 ,아니면 무용지물이라 여기는지....
아니면 거부하는 지...
아니면 관습과 제도의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결혼의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데 정말 걱정된다.
마리가 이 책을 어떻게 발표할런지... 궁금증이 만발한다.
공감이 가는 문장들도 많았다.
"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 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결국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식의
동어 반복적 정서에 묶여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사랑을 통한 합일의 소실점이 없다)
" 대체로 사랑의 언어는 바로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거나 못한다. 오히려 연인들은 특정한 어휘나 구문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알리바이 아래 유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여자들은 수시로 남자에게 묻는다, “자기 나 사랑해?”
이 때 남자의 대답인 ‘사랑해’ 라는 말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통해 사랑하는 여자의 기분을 좋게 하거나, 의심을 누그러뜨리거나
그녀를 자기 곁에 묶어 두려는 언어적 포박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언어가 사랑을
표현한다기 보다 알리바이가 있는 유희라는 저자의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사랑해’보다는 ‘널 떠나고 싶지 않아’가 더 사랑의 언어가 아닐까?
사랑의 언어는 사랑이란 단어가 배제되어야 그 격조가 높아진다. )
사랑은 클라이맥스 같은 것이 없는 ‘물상들이 연인의 가면을 가리키며 진행되는 연극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소실이며,내내 소실이고,마침내 소실인 것이다.
( 사랑은 본질적으로 가면극인지 , 아니면 필요성에 의해 가면이라는 소도구가 필요한 연극인지는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에로스적인지 아가페적인지의 편향성에 의해
비중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사랑을 소실의 기하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 파장이 다른 결절이 있는 주파수 그래프로 본다면 사랑은 상칭과 결절의 반복이다. )
( 저자는 위리안치,소실점,상칭 이 세 단어를 통해 사랑의 속성을 기하학적인 모티브로
풀고 있다. 일상적인 남녀간의 사랑이나 사랑과 관련된 여러 가지 관습 제도 등은 상대를
어느 일정 범주에 가두어두려는 시도들이다 그리고 소실점을 조기 가시화 하려는
노력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사랑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소실점은 어느
시간의 언저리에 있는 것일까?지금 보이는 소실점 조차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상칭의
관계에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애인의 살에는 정신의 결절점이 보이지 않는다.
( 인간의 섹스라는 행위 자체는 정신의 결절이라기보다는 욕망의 결절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감정, 그로 인한 살의 허용. 그 결심의 과정을 정신의 결절 과정으로
본다면, 섹스는 분명 정신적인 결절의 결과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결여감은 곧 잉여감을 낳고, 잉여감은 다시 결여감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을 동경하고, 사랑했던 사람은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일생에 한 번만 주어지는 판도라의 상자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랑을 동경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랑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담아야 하는 바드러운 것이라면, 끊임없이
가슴 속의 사랑의 샘에서 사랑을 길어 올리라는 에리히프롬의 무대뽀적인 사랑의 기술은
위험한 발상이다.)
연인 사이에서 돌출하는 상처의 기억은 대체로 언어와 연루되어 있다. 내 지론을 다시
반복하자면, 연인들은 마음을 챙기느라고 언어를 늘 혹사한다.
(사랑은 느낌으로 알 수 있고 눈으로도 말한다고 한다. 이건 상당히 고수들에게서 보이는
내공이다. 그러나 한 마디 말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기 시작하다 보면 이 내공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대게는 상처 내기 이전에 인내의 반창고를 먼저 갖다 붙이지만
사랑의 상처는 반창고가 보호대가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랑의 상처는 기억의 상처이다. (명언이다!)
추체험 :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낌.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낀다기 보다는,자기 안에 있는 다른 욕망이 그린
사랑의 사양(스펙)을 현실적 체험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더 강하지 않을까?)
스푸마토와 푼크톰
(스푸마토와 푼크톰은 사랑이 가진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 아닐까?
우린 때로 사랑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 그저 주변을 맴도는 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 상대의 부재 혹은 존재가 푼크톰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고,
푼크톰으로 다가온 사랑이 어느 날 사랑의 저 경계 저편에 서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두 단어를 합한다면 화이트 스콜이 아닐까?
영화 <남 주기 아까운 그녀>{ 원제는 신부들러리(Made of Honor)}를 한 번 보라)
“ 인간의 에로티즘에는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있다”
(분석적으로 보면 그렇다. 내 생각에는 흥분과 허무 또 다른 기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아토포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충만 속에서 벌어지는 아득한
공허의 체험 말이다.)
사랑이라는 이상 종교는 무서운 긍정이다.
( 모든 종교는 긍정이다. 그리고 동시에 배타적이다. 남녀의 사랑도 그러하다)
“ 사랑은 타자성과의 관계, 신비와의 관계, 곧 미래와의 관계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게
거기 있는 세상 속에서 결코 거기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다”
( 과연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을 하고 살다가 죽었을까?)
신문을 보는 아내는 간음한 여인!?
( 재미있는 표현이다. 남편을 통한 대리적인 접촉을 벗어난 여인, 남편의 성기 외에도
다른 크기의 성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여인은 그 신문을 통해 무엇을 보았을까?)
환상은 공상과 달리 비교적 체계적이다. 공상은 어떤 순발력의 이름이지만, 환상은
순발력이 사라져버린 상상의 형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환상이란 무엇보다도 소망의
성취를 향한 그 나름의 필연성을 움켜쥐고 있다는 점이 공상과 다른 특징이다. 그리고
환상을 소유한 이들의 마음 속에는 소망이 성취되는 방식-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일지라도
-에 대한 나름의 인과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 성격 차이로 이혼 법정에 선 어느 일편의 변호사의 변론처럼 들린다.
소망화된 환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혼 당한다.ㅎㅎㅎ)
연정은 매력이라는 인력의 메커니즘에 의해서 움직인다.... 인력 그 자체의 원동력으로서
척력을 달고 다닌다….예의 척력은 일종의 외경감인데, 그것은 단순히 존중이 아니라
경외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연정은 분명 의무감의 결과물은 아니다. 매력이라는 인력이 존재한다. 동시에 강한 매력
혹은 경외에 가까운 매력은 척력을 동시에 수반한다. 하지만 정작 그 본인은 그 척력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외로운 공주 외로운 왕자는 이렇게 탄생된다, 척력 때문에, 경외감 때문에... )
구애가 육체의 것인지 심리의 것인지조차 선명하지 않은 것이다.
(구애는 둘 다이다. 하나가 빠지면 그 사랑은 의심받는다. 그것은 선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사랑보다 물심이원론의 영향이 강고한 곳은 없을 것이다. 물의 왜곡과 패악이
극심한 곳에서 조차 심은 여름 종달새처럼 치솟아 ‘지지배배’하고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사랑이 있는 곳!
( 사랑은 각인된 기억만으로도 한 사람의 마음에 오래 자리잡아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물심이원론은 설득력이 있다. 특히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나 사랑했던 이에 대한
동경 같은 것 말이다.)
성장주의의 템포가 지배하는 곳에서, 성숙의 여유는 그 성숙에 필요한 언어성의 지평과
더불어 망실될 수밖에 없었다…..’여자와 남자가 더불어 말하지’….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되는 이 성장과 성숙의 어긋남이 필경 여자와 남자가 서로 만나고
대화하는데 실패한 일로 소급된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패의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우선적 관제는 ‘여자의 말을 배우기’로 시작되어야 한다.
( 글쎄…왜 갑자기 저자가 여자의 언어를 더 성숙한 것으로 말하는 것인지…
진정 남자가 더 성숙했다고 스스로 믿는 치기적 관용인가? 지금까지의 사랑의 언어가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왜곡이 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많은 사랑에 있어 남자는 스스로
여자에게 굴복했던 점을 생각하면 사랑의 언어에 있어 양성 평등의 원칙은 고수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일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고 서로 비슷한 것이다)
나 홀로 자유가 아니라면 , 자유는 오직 더불어 사는 자유일 뿐이니, 무릇 공共자유가
아니면 그것은 곧 공空자유.
(사랑을 떠나 공共자유란 개념은 상당히 어렵거나 모순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사는 것 자체는 자유일 수 있으나 ‘서로 자유로움’ 혹은 ‘모두 자유로움’은
기존에 인류가 만들어 온 사랑의 제도와 관습과 주로 위리안치하는 것들을 모두 깨어
버려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결혼, 반품률이 50%에 이르는 고가의 상품
(이 반품은 제품이 하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사용으로 싫증이 난다거나
기대했던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많은 모양이다.
대부분의 반품 사유가 성격차이라고 하니 말이다. )
(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반품이 아니다. 용도의 폐기다.
대게의 제품이 무상 유지보수 기간 동안만 반품해 준다.
결혼은 무상 유지 보수 기간이 없다.그러니 반품이 없다
그리고 제품을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용도에 맞춰 내가 살아야한다.
이런 억움함이!)
‘가슴이 믿는 것을 머리가 의심할 수 없다’고 했던 것처럼,’몸의 노예를 정신의
기동력으로 해방시킬 수 없다’
(하지만 몸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유일한 수단이 정신의 기동력 아닌가?
몸으로의 노예상태는 몸으로의 해방 밖에는 없는가?
바람난 남자 따라간다는 여자, 아내에게 귀향한다는 남자, 그렇다면 남자는 몸의
노예상태에서 비교적 풀기 쉬운 사슬을 달고 있는 셈인가? ㅎㅎㅎ)
포퍼식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실연이 사랑의 본질이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실연이라는 사랑의 현실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져 본 경험이 없는 자는 사랑을 논할 수 없다. 사랑의 추체험은
둘만의 은밀한 그 언어와 사건들을 완벽히 이해하지 않고, 다만 판단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이런 외부의 추체험적 판단이 없다면 사랑은 때로 자가당착적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오락기의 이름이 되고 만다.)
고백을 정신이라기 보다는 제도로 보는 시각은….사랑을 고백이라는 형식에 의해서 가감
없이 포장할 수 있다고 믿는 이데올로기적인 태도와도 결별할 수 있는 계기를 선사한다.
…고백과 소문은 무엇보다도 상처의 공工장이다. 그러나 그 공장은 공公장이 아니라
사私장이기도 하다. 이 사私장이 모든 상처의 기원이다.
(그렇다 고백은 공공재의 사용이 아니라 사유물의 제공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것도
남 따라 하기에 희생되고 있고, 다만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수준은 높아진다.
고백은 단순한 것이다. 나 너 사랑해! 그 외에는 사족일진대 많은 사람들이 그 사족에
목을 맨다. TV 드라마라는 사랑의 공장을 통해 사랑의 기성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일까?)
전반적으로 이 책은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쉽고도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약간의 철학적 표현이 그 중의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구든 심각하게 사랑을 갈무리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난해한 선문답으로 사랑을 곱씹어 성숙을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이상 곱씹어도 좋은 책이다.
그리고 저자가 고민했던 '진실한 사랑'에 대한 열망을 나름으로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사랑한다는 감정,그리고 사랑의 표현에 관한 언어와 관습과 제도의 '가면성'
사랑에 혼재된 육체와 정신 혹은 육체적 탐닉에 대한 세습된 죄의식에 대한 반항 등등
다소 철학적 문법이기는 해도 저자가 찾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