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독후감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 김난도

 

<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 김난도>

 

책 제목 부터 흔드는 무언가가 있다. 참 제목을 잘 뽑았다는 공감과 과연 그럴까? 라는 반감이 내 머리 속에서 흔들린다. "成人은 聖人이 아니다."라고 표현하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는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과 '천 번을 흔들려도 어른이 될 수없다.' '한 번을 흔들려도 제대로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등등 그저 말장난 처럼 들릴지 모르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저자가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은 흔들림에 익숙한 어른임을 책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청년기에 바라보는 40대는 얼마나 원숙하고 자신감있으며 흔들림없는 모습이었는가.  이른바 성공을 하고 그 성공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 받고 있을 을 확신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차분하고 흔들림없는 눈빛을 가진 사내들이었고, 아주 현명하게 처신하는 아내이거나 이미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어머니로서 성스러운 광채와 세상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향기가 완연해진 그런 존재들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50을 코 앞에 둔 나이에 바라보는 40대는 방황과 치기와 세상 모든 욕망의 화신이자 노예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내게 아직 어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 보이는 어른들은 그들의 경험보다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르고, 삶의 지혜보다 죽음의 지혜를 더 많이 쌓아가는 노쇠한 분들이다. 하지만 그 어른들도 때론 어린 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노자가 도인이란 그저 어린 아이같은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그 분들이 다 노자의 도의 가르침을 실행하고 있지는 않을 터라 곧잘 그 어른들을 부정하고 그저 노인 취급을 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자신의 부모와 약간의 친인척들 그리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거나 삶의 업적이 훌륭하거나 자신이 스스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어른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 어른관이 지천명에 닿아 있음을 보면 나는 참 간사하다. 간사하다는 건 어른이 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이지만 동시에 어른답지 못한 것이기에 '흔들린다' 나의 어른에 대한 정체성이.....

 

저자는 어른을 흔들리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존재로 성숙해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그저 시간이 가져다 주는 칭호가 아니라 성찰이 있어야하고 성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인생의 변화가 꾸준한 성찰과 성숙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고교시절 아버지를 여윈 친구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는 갑작스레 어른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훗날 그 친구는 더 이상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많이 무너져 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서야겠다는 각성이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라는 이야기를 했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그 친구는 삶의 한 계기를 통해 자기 삶의 짐을 가장 정학한 무게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른됨은 그런 계기를 통해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저자가 보는 어른다움은 삶의 변화가 각인되는 맨얼굴과 삶의 변화가 꾸며지는 자신의 가면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는 또하나의 객관적인 자신을 만들 줄 아는 것이라 한다.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완성해가는 것에 초점을 두면서 남의 시선에 노예가 되는 것에 조금은 초탈한 모습도 어른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말하기 보다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는 모습, 기득권에 안주하는 모습이 아닌 어쭙잖은 기득권을 모두 내려 놓을 수 있는 개방성과 자유로움 그리고 그런 결심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용기 또한 어른다움의 모습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아마 이 책은 자식에게 설득력있고 조리있는 말로서 가르침을 주기에 스스로 부족하다 느끼는 부모들이 어떤 선생을 모실까 고민하다 고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말이 이제 어른이 되어 가는 이들에게는 공감으로 다가갈 지 모르나 이미 어른이 된 이들에게는 뭔가 많이 부족해 보이고 저자 역시 그런 치열한 어른됨을 모두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생의 입장에서 해준 말들이라 힘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제목은 정말 잘 뽑았다. 독자 대상이 분명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자의 전작도 제목이 참 좋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춘은 원래 다 아픈거다. 설익은 과일이 제 맛을 못내듯 성숙하지 못한 것은 다 아쉬움이 있고 또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아픔들에게 청춘이라 정의하고 또 자신의 아픔을 잊고 사는 그 청춘들의 부모들에게 다시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모티브를 주기에 충분한 제목이었다. 물론 내용은 2% 부족했다. 하지만 이런 책 제목을 가진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그 부족한 2%보다 98%가 더 갈급한 모양이다. 그리고 또 어쩌면  어른은 그 98%를 좀 더 봐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많은 어른들이 저자의 말처럼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막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들에게 편지 한 장 쓴다.

 

형!
살면서 신념과 희망만으로 세상에 맞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신념이 회의가 되고 희망이 절망이 되는 그런 때가 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아마도 죽음을 택하지 않을까 싶군요. 죽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리라 생각해봅니다.그리고 저는 죽을 용기도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절망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죽음을 택하기 보다 그저 죽어가는 것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신념을 회의하기 보다 망각의 단물을 빨고, 희망이 절망이 되는 안타까움을 느끼기 보다 환영이 주는 거짓 희망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그런 삶이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은 바람에 밀려 겨울로 향해 날아가는 힘없는 낙엽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낙엽도 급이 있겠지요. 어떤 낙엽은 걸귀처럼 마시던 수액도 거부하고, 태양을 호흡하던 푸르름이 사라진 뒤 자신과 나무의 생명을 살찌우던  바로 그 태양에 온 몸이 말라 죽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낙엽임을 인식하는 낙엽이라면 떠나야할 계절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리를 비켜준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숭고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궁금합니다. 형이 죽어야할 이유를 찾기 보다 살지 못할 이유를 찾는데 급급하지 않았는지.... 죽어야할 이유를 찾았었다면 어떤 죽음을 선택할지를 고민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단지 자리를 비켜주는 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낙엽의 의미를 살필 줄 아는 것처럼 삶의 의미를 만들고 채우고 물려 줄 줄 아는, 살아 있었음에 대한 의무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죽기 전까지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누리고 즐겼다면 우리는 그런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택하셨다 말할 수 있겠지요. 형의 존재 자체가 가치있다 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안보이던가요? 아닙니다. 형이 애써 외면한 것이겠지요. 그런 외면이 바로 죽어야힐 이유가 아니라 살지 못할 이유가 된 것임을 이제는 아시겠지요.

 

형이 남겨진 자신의 죽음의 무게가 바로 그 사람의 삶의 가치라 이야기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나는 형이 그런 가벼운 죽음을 선택했다 생각지 않으렵니다. 몸쓸 감기 때문에 입원한 것이라 여기고 훌훌 다시 일어나 강산을 변화시키는 집중의 10년을 채워가는 형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서평·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덕경 >  (0) 2013.01.08
다윈지능 / 최재천 저  (0) 2013.01.08
파리5구의 여인  (0) 2012.11.12
< 남자의 물건 > 김정운 저  (0) 2012.05.11
<섬: 독후감> 장 그르니에  (0) 2012.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