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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정유정의 소설 <28>

[ 28 - 정유정 지음/은행나무 출판]

 

재미있는 소설은 몰입이 쉽다. 그리고 몰입은 멈추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소설책은 한 번 잡으면 끝장을 보고 마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은 다소 책읽는 사람으로서의 의무감으로 읽는 경우가 많아 몰입보다는 책장을 덮을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으로 읽는다. 정유정의 소설<28>은 근래에 드물게 몰입해서 읽었다. 한편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다. 그런 영화라면 단지 재미있었다 외에는 별로 남는게 없지만 이 소설은 여러 측면을 생각하게 하는 재미를 던져준다. 우선  소재도 특이하거니와 상황과 심리를 세밀히 묘사해 가는 작가의 필치와 빠른 전개가 그리고 주인공이라 생각했던 인물들이 죽어 나가는 반전의 연속이 48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한 번에 독파하게 만든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 숨가쁜 재미가 주는 여운이 길다. 여운이란건 뭔가 분명하지 않지만 머리 속을 더나지 않는 감동이나 감정의 잔여물일 것이다. 원두 찌꺼기가 보이는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남겨두듯 이 책도 그렇게 남겨둬볼까 생각했지만 그러다간 다방에 죽치고 앉아 담배만 피고 있을 것 같아 정리를 시작해 본다.

 

< 욕같은 제목>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욕은 대부분 생식기계와 동물계로 구성되며 욕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동물생식기계가 사용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욕에 등장하는 생식기나 동물이나 보통은 사람들이 아끼고 소중히 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새끼도 마찬가지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새끼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왜? 사람에게 동물이라 칭하고 심지어 그것의 새끼라고 부르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새끼 역시 욕으로사용되는 걸 보면...
욕은 몇개 안되는 단어로 아주 아주 고농도의 감정을 전달한다. 때론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데 말이 아닌 느낌으로 전달하고자 할 때도 사용된다. 혹은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자신의 나쁜 감정을 표출할 때 그것이 잘 흘러 나오게 하는 추임새 또는 어조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욕도 연구 대상이다, 누가 욕으로 사용되는 언어에 대해 연구한 것이 있으면 한 번 읽어 보고 싶다.
  
이 책의 제목인 <28>은 언뜻보면 욕을 숫자로 표현한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소설을 이끌어 가는 동물 도한이 개다. 이 두가지 만으로 유추하자면 작가는 입밖으로 내뱉고 싶은 쓴소리가 목구멍에 가득차 있는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작가는 욕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나쁜 기억들을 연상하게 하고 선량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 넣으며 독자가 욕을 하게 끔 만들고 있다. 28! 또한 작가는 <28>이란 제목을 소설이 전개되는 28일간의 시간을 말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소설 곳곳의 깔려 있는 우리 사회의 아픈 역사와 풍자를 욕하고 싶은 중의적 의도는 숨길 수 없다.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애매한 승리, 좀 아는체를 하자면 욕같은 제목으로 출발한 이 소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패이소스적인 오마주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하필이면 28일까? 18도 있는데?  욕으로서 십팔이 자조적인데 비해 이십팔은 분노 혹은 더러운 감정이 밖으로 향하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 소설 속에서 욕하고 싶은  대상이 되는 타자들은 곧 욕하는  자신 역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즉자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타자를 향한 욕의 메아리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28은 18을 담고 있으므로  패이소스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점이 지역>
우리는 흔히 자기가 처한 부정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외적인 요인을 찾기 보다는 내적 요인을 찾아 변화를 꾀하려 할 때 '환부를 도려낸다'는 표현을  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려 내고픈 환부와 도려 내어야할 환부가 끊임없이 드러나고 교차된다. 하지만 도려내야할 환부건 도려내고픈 환부건 반드시 도려내어지지는 않는다. 환부인줄 알면서도 그냥 품고 가기도 하고 그 때문에 죽음을 맞기도 한다. 환부를 도려낸다는 것이 반드시 생명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기 대문에 망설이다 그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환부라는 것이 모호하다는 것에 기인하다.  육신의 환부는 분명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 경계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점이 지역이 있다. 대게는 이 점이 지역까지 환부 취급을 받는다. 실제 암부위보다 더 넓은 범위를 도려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점이지역을 도려내는 목적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일까? 아니면  새로운 감염 위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가 일방적으로 시행하는 폭력적 상황일까? 아니면 양자간의 암묵적 합의의 결과일까?

 

점이 지역은 완충지역일 수 있다. 완충이란 말은 보호되어야할 대상의 관점에서 표현되는 폭력이다. 결국 완충 지역은 상처를 입는 지역이다. 그래서 도려낼 수 밖에 없는 환부에 포함되는 것이다. 삶의 신성함이 무너지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나 특별한 의도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로인해 그저 매일 반복하던 일상이 무너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건물만 빼곡히 들어선 도시에서 모든 건물의 화장실이 부서져 버리고 없는 상황을 가정 해보자. 신성한 도시적 매너와 비록 공중 도덕일지라도 그 도덕적 신성함은 쉽게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배출한 그 오물들로 인해 도시는 삶의 터전에서 폐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일상의 붕괴에도 완충이나 점이지역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평소에 그것에 둔감한 채로 산다. 그래서 아주 간단히 건물의 다른  한귀퉁이를  화장실이라고 이름 붙이는 걸 못한다  그 결과 건물의 이곳 저곳 어슥한 귀퉁이가 모두 화장실로 변하게 되고 마침내는 도시 전체가 화장실이 되고 만다. 소설에서는 병원이 바로 그런 점이 지역이었다. 그 점이 지역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시점부터 화양시의 환부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완충의 점이 지역, 어쩌면 우리 삶의 필수공간이라는 생각을 뜬금없이 해본다. 

 

살이 썪어나가는 병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환부를 도려내는 것은 치료라는 관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도려낸 상처를 가진 병자의 삶은 이전과 온연히 같아질 수 있을까? 아마도 십중 팔구는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을 봐야할 것이고 세상 또한 새로운 관점을 덧붙여 바라볼 것이다. 아마도 이 소설은 그런 것을 노리지 않았나 싶다. 소설 속의 대한 민국을 위해 화양을 도려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나 권력은 지금 존재한다. 그들의 논리는 항상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일단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의 원칙이 정해지면 점이 지역에 대한 고려가 없다. 그리고 그런 고려 없음을 대의라 항변하고 명분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대의는 언제나 위험하다. 그들의 대의는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는 쪽에 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희생하는 쪽에 속했더라면 그들은 언제나 특권을 들고 나올 것이다.그 특권이 바로 점이 지역이다. 그들만 살겠다고 설정하는 점이지역.  소설 속에는 이런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대신 잔인한 학살의 점이 지역을 드러 내고 있다.  병원 뒷산이나 행진하는 무리들이 총격을 받는 지점  그리고 개들이 매장되던 곳, 그 장소들은 직접적인 환부라기 보다는 모두 점이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런 물리적인 공간만이 점이 지역이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가 환부라면 그 상처로 인해 둘러처진 경계들 그리고  공포들 혹은 과거의 경험들이 다 점이 지역이다. 생명이 꿈들거리는 곳에 물리적인 경계는 모호하다. 휴전선이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그 경계를 넘나드는 동물들에게 남한 동물 북한 동물 할 수 없는 것 처럼 인간이 설정하는 경계라는 것이 사실은 다 모호한 것들이다. 마찬가지다. 마음도 모호하다. 작가는 이런 모호한 마음의 경계가 다 점이 지역이란 것을 오히려 암시적으로 적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과 기대는 폭력일까?>
 소설 속에서는 감염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냥 주어진 상황처럼  받아들여진다.  전염병에 감염된다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그로 인한 혼란과 공포가 이야기의 초점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사건 전개의 흐름을 이끌고는 있지만 소설 속의 살인은 굳이 전염병과는 연관을 짓지 않아도 일어날 법한 것들이다. 특히 동해의 살인은 전염병과는 무관하다. 왜 동해를 이 소설에 삽입했을까? 링고의 캐릭터를 잡아주기 위해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기대와 이에 부응하는  자식의 모습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삶의 모습이다. 비록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지만 부모의 뜻을 따라 그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은 훈훈한 미담처럼 이 사회의 곳곳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떠돌았다. 하지만 그것이 미담이 된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입장 즉 기성 세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자녀 세대를 세뇌하기 위함이었다. 세뇌가 필요한 이유는 그 오랜  기간 동안 곳곳에 균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동해는 그런 균열이 그저 염려할 정도가 아닌 흡사 크래바스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의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인물이다. 동해의 부모가 원하는 것은 자녀의 행복이기 보다 자녀의 성과였다. 있는 그대로의 동해를 보지 못한 아니 보려 하지 않은 교만이 스스로 실패한 부모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했고 그 근거는 아마 다른 자녀들이 보여 준 성과였을 것이다. 동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의 맹점을 이야기 하려 했을 것이다. 그 맹점이 바로 폭력이라는 것을... 동해는 폭력의 가해자지만 그 원인은 그가 바로 그런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 데 이것이 왜 <28>에 필요했을까? 아마도 기대와 희망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전염병이고 그것의 극단은 바로 폭력적인 상황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가 아닐까?    

 

<5.16의 오버래핑>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통제까지는 필요한 조치였다. 그것은 화양시민의 눈에도 당연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 있는 질병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는데다가 그 전염의 속도가 무시무시했고 때문에 그에 대한 공포죽음보다 절박했을 수 있다. 하지만 경계를 뛰어 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총격을 가하는 장면을 그것도 군인에 의해 자행되는 것을 서술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량의 학살의 현장이 우리 현대사에 적잖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것을 회상시키기 위함이었을까? 4.3의 제주와 5.18의 광주가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것일까? 누나와 살가운 전화 통화를 하던 동생이 소속된 군대인데 명령에 움직이는 군대라는 특수성을 아무리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지켜야할 국민을 향해 집단 혹은 개인이 총을 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인륜과 도덕 위에 군림하는 법의 패단과 몰개성적 집단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드러낸 것이다. 과연 소설 속의 군인들은 안전지대의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은 공포가 있었을까?  그러한 공포가 개인적인 도덕성이나 인간성을 넘어 폭력을 행사하도록 용인한 것일까? 아니면 안전지대의 사람들을 보호해야한다는 절박한 의무감이 있었을까? 소설은 그런 의무감을 전혀 서술하고 있지 않음으로써 폭력을 도드라지게 하고 있다.
 
지금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니 부마 항쟁으로 표현되지만 내 기억의 처음에는 둘다 ~~사태라고 불리던 것들이다. 그 때는 사실은 피해자였던 광주 사람들이 폭도들이었고 그들의 폭도 이미지는 역사적으로 유배지였던 전라도 사람이란 전체를 대변하면서 당당히 오랬동안 조심해야할 사람들로 남게 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폭력의 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잔상 역시 폭력이라면 그 잔상은 어디까지여야할까? 나의 청소년기의  많은 경험들이 폭력이었다. 학교에서도 싸움 잘하는 놈이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몰려 다니는 놈들이 폭력을 썼다. 기실은 그 녀석들 역시 폭력을 무서워하면서도 폭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길들여진 녀석들이었다. 그 녀석들이 우리를 폭력으로 길들이고 있었기에 대학에서 조차 우리가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돌멩이와 화염병이라는 다른 폭력이었다고 생각된다. 큰 폭력 앞에 저항하는 작은 폭력이라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작은 폭력이 피해자가 되는 영상을 사회에 퍼뜨렸다. 폭력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악하게도 80년대 시위 현장에서는 양측 모두가 폭력의 가해자였음에도 폭력의 피해자로 비춰지기를 원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폭력적 수단이었다는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간교한 폭력들을 묘사하고 있다. 재형에 대한 윤주의 폭력에서 시작하여 개들에 대한 인간의 폭력 그리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폭력과 폭력적 상황을 가리개 삼아 일어나는 폭력과 인간 집단이 인간 집단에게 가하는 폭력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폭력이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링고라는 개조차도 인간에게 폭력으로 복수하는 모습으로 그려야했던 것은 이쩌면 보다 본능적인 인간의 폭력성이 폭력의 피해자라는 정당성으로 포장되여 드러내는 것을 비꼬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경계와 결계>
이 소설을 읽다보면 경계라는 단어가 자주 떠오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다움과 비인간적인 것의 경계, 부모와 자식의 경계,우연과 필연의 경계, 어리석음과 현명함의 경계, 선과 악의 경계 등등. 경계는 유무형의 어떤 속성이 미치는 범위의 둘레라 정의할 수 있다. 흔히 경계는 공간적 경계로 쉽게 연상되기 때문에 우리는 기하학적인 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많은 경계들은 선을 분명히 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이다. 그리고 경계라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닫거나 가둬둔 폐쇄적인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차라리 경계는 열려 있다고 봐야한다. 그렇게 때문에 경계를 닫는 행위 즉 결계가 이루어진다. 결계는 모호함이 최대한 배제된다. 최대한의 배제라는 것 역시 모호하지만 이 역시 인간의 한계를 두르는 테두리다. 인간은 모호함의 외곽에 새로운 경계를 둘러 분명한 경계를 그리려 한다. 환부를 도려낼 때도 정확히 환부만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부분을 일부 같이 도려내어 환부일지도 모를 모호함을 배제하려한다. 앞서 언급했던 점이 지대다.  소설에서는 이런 환부와 같은 경계들이 펼쳐져있고 이 경계를 닫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묘사되고 있다. 사람살이에 있어서의 결계는 대부분 공유되는 비밀이 존재한다. 혼자의 결계는 자폐라는 병으로 진단한다. 그러나 여럿이의 결계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이 병인줄 모른다. 왕따, 지역 이기주의, 그들만의 리그, 쇼비니즘 따위의  모든 표현들이 다 사람살이의 결계를 지칭한다. 결계의 공식은 경계 너머로 들어 온 것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수단이 바로 비밀의 공유이다. 남들이 다아는 뻔한 이야기도 비밀인양 공유하게 만들고 비밀이 아닌 그 비밀을 누설하면 변절이나 배신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변절이나 배신은 사회적 고립을 유도할 수 있어 결계를 벗어나는 사람들에게 결계를 걸 수 있다. 다시 말해그것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차용한 간교함이 내건 간판일 수 있는 것이다.     

 

<다수 화자 시점>
소설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 박태원의 <천변 풍경>이 떠오른다. 도입 기법이 영화같은 느낌이다.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광경의 묘사가 헬리캠에서 근접카메라로 스위치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심한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갑자기 빨려들게하는 듯 하다.  이 소설은 다수 화자 시점이다. 각 주인공의 시점에서 공통된 상황을 재해석하는 방법을 씀으로써 한 사건에 대해 각 개인 나름의 이유를 적어 나가고 있다. 세상에 객관이 어디있겠는가. 주관과 상대를 조금 배려한 주관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항상 주관은 충돌한다. 그 충돌 속에서 인간의 삶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뻔한 갈등과 뻔한 갈등해소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 뻔함은 바로 소통과 이해의 유무이다. 소통과 이해가 없으면 갈등이고 그것들이 이루어지면 해소가 된다. 다수 화자 시점은 바로 이런 것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 표현되는 여러 갈등들의 주인공들을 작가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설명하지 않고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넘겨버림으로써 독자 스스로 갈등을 이해하고 해소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앵글은 어쩌면 폭력이다. 앵글이 많아야 그 폭력이 줄어든다. 이 책을 읽은 내 주변의 많은 여성 동지들이 이 소설이 폭력적 상황을 너무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폭력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다수화자기법은 잔인해 보이는 장면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궁극으로는 여러 입장의 이해를 지향함으로써 비폭력으로 인도하는 통로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도덕적 난제>
도덕은 인간의 모둠살이를 위한 시비선악의 기준이다. 이 기준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의 폭력성을 자율한다. 하지만 그 자율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지를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자율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폭력에 의해도 무너지지만 그것은 저항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의해 무너지는 자율은 그것을 지키려는 저항조차 힘들게 한다. 아마 바이러스가 사용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애정이 증오로 변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해석하는 생각 때문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했다고 믿는 신념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수공통바이러스는 묘하게 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게끔 만들고 있다. 그러나 소설 어디에도 분명한 시작점을 명시하지는 않고 있다. 물론 개들이 전염의 매개가 되기도 했지만 기실 사람들이 죽어 나간건 사람들 간의 접촉 때문인 것으로 암시되는 부분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개들은 인간으로 부터 버려지고 인간에게 학살 당한다. 그리고는 인간도 역시 인간으로부터 버림받고 학살 당한다. 시비선악의 기준은 있으되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상항 바로 폭력성에 대한 자율이 무너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폭력성에 대한 자율이 무너진 것은 자율인가 타율인가? 크게 도덕적 난제라고 할 것도 없는 질문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바이러스라는 타율적인 요소를 등장시키고 있다. 물론 바이러스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중의적 사건들은 바이러스가 없이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어야 한다. 물론 바이러스를 배제한다 해도 실제는 다른 요인들이 바이러스를 대체하기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왠지 작가가 내재된 인간의 폭력성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은 타율적 상황을 빌미삼은 자율이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헌신적인 사랑의 전형을 보여 준 인격을 갖춘 주인공 개들과 개만도 못한 인간의 대비를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 싶었던 도덕적 난제는 '도덕은 자율적으로 인간이 그정체성의 유지하기 위한 견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것인가?'가 아닐까? 

 

<무엇을 위하여 아침에 일어났을까?>
만약 이 소설이 사실의 기록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들은 28일이 시작되는 그날 아침 무엇을 위해 일어났을까?
아마도 일상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제와의 연장선에서 무언가 연속적인
시간의 전개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은 시간은 일상과 연속성이 모두 무참히 파괴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파괴를 경험하고 나서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아침에 일어났을까? 아마 쉽게 떠오르는 대답이 생존을 위해서 일 것이다. 생활은 우리 삶의 관계와 균형과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생존은 그 모든 것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 생활은 삶을 누리는 법이 강조되지만 생존은 죽음을 피하는 법이 강조된다. 생활은 지금 우리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하는가를 생각하게 하지만 생존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요약하자면 생활은 이성이 동인이고 생존은 본능이 동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생활과 생존이 양립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하는 처음 생각이 과연 어떤 쪽에 더 가까울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보다 무엇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까? 삶은 분명 누리는 것임에도 삶을 살아야하는 상황에 몰리는 지금의 우리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치명적 바이러스에 노출된 채로 생존의 영역으로 끌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치명적 바이러스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