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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파우스트>에서 괴테 읽기

 

 

< 프롤로그>

지난 한달 간의 파우스트와의 전투를 내려 놓기에 참 적당한 곳이었다. 탁트인 바다의 전망이 유리로 된 벽면 전체를 채우는 곳, 또 그 유리를 접으면 바다의 냄새와 그와 더불어 존재하는 사람이 사는 작은 풍경들의 소리와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햇살이 여과 없이 방안을 아름답게 침범하는 곳,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바다 사이의 경계를 가늠케해줄 양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끔 기차가 지나는 곳, 그곳에서 파피 식구들이 맛있는 빵과 커피 그리고 얼굴을 알 수 없는 파우스트와 함께 앉았다.

 

담배 한모금 물고 그 방에서 하늘로 향하는 구름 한 점을 맏들어 보고 싶었으나 그들의 하늘에 없는 풍경을 만들기가 미안했고 나의 패부에 익숙해진 마른 풀의 냄새가 그들에겐 악취가 될 수 있기에 참았다. 다행히 참은만큼  생각의 나눔이 간절해졌고 간절한 만큼 풍성해진 느낌이었다. 파피스러운 토론의 고집을 바드럽게 침범하며 반론도 해 보고, 송정으로 향하는 산길을 택한  사람들과 이별하며  그들이 가질 토요일 오전의 햇살만큼이나 밝은 웃음을 상상하며 부러움도 가져보고 혼자 돌아서는 이의 외로움도 그리고 피곤한 몸을 쉬게 할 귀가의 기쁨도 잠시 잠시 스쳐가듯 만났던 아침이었다.


         
<책, 사람 그리고 책 속의 사람>

: 1982년 겨울, 학력고사를 마친 아들에게 나의 어머니는 책장에 꽂힌 고전 전집을 가리키며 한권 읽을 때 마다 거금 만원을 용돈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급한 나의 계산은 이랬다. 하루에 한권,한달이면 30만원, 인크래더블한 금액이다. 하지만 그 겨울에 내가 받은 용돈은 3만원이 전부다. 그것도 거의 3달에 걸쳐...<로미오와 줄리엣> <파우스트> <데미안> . 익숙치 않은 문체며, 영화나 다른 매체를 통해 익숙히 알고 있는 스토리며, 또 번역문이 주는 어색함이며 쓸데 없는 장황한 대사나 묘사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책을 읽기보다 책과 씨름하게 만들었다. 단지 용돈 외에는 책을 읽어야할 명문이 없었으므로...그리고  '안다이 경연장'에서 그 책을 한 번 읽어 봤다는 자랑거리가 된 것은 한참 후에 얻은 명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책에 대한 분별이 생기기 전까지는 책은 읽는 행위 보다 읽었다는 경험이 장신구가 되는 것 같다.

 

 어쨌든 그로부터 30년이 더 지났고 그간 상당한 시간을 활자와 함께 했지만 이번에도 녹록치는 않았다. 여전히 재미없고 여전히 호흡이 길고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여정에 끼어 있는 불필요해 보이는 대목들은 기름기 많은 돼지 목살을 대하듯 불편하기까지 하다. 간독으로 넘어가다가도 다시 돌아오곤 한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책을 펼치고 인내해야 할 내 나름의 명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 책이 '사람과 삶과 그 의미 '라는 요즘 내 생각의 주제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성공한 사람으로 살아야한다는 강박의 연속이었으며 그 성공을 위해 내딛은 어느 눈먼 한걸음이 지난 10년의 시간을 채워 오고 있다. 교만의 그림자치고는 너무 길고 깊다.  반대로 성공한 작가로서 호흡한 연수가 꽤 길었던 괴테는 그의 삶을 그의 작품 속에서 어떤 식의 메타포로 갈무리 해두었을까? 이것은 억지로 발견한 호기심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내 삶의 의미를 알고 싶고, 혹시 신이 그 '지금' 속에 어떤 메타포를 심어 두었다면 그것을 찾고 싶다는 간절함이 무시로 찾아오곤 하기 때문에....

 

책을 통해 만나는 사람의 핵심은 작가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이야기 속의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파우스트>에도 잠간 언급되어 있지만 신의 영역을 경험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눈은 전지적 시점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스스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산 인간이 지금까지 한명이라도 있었을까? 자기 모순을 경험하지 않고 산 인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은 내재적인 모순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내재적 모순은 종종 자기가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운 결론을 만들어 내곤 하는데  그것은자신의 삶과 그가 바라보는 혹은 생각하는 자신의 삶 혹은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치열하게 그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려한 결과가 아닐가 생각된다. 괴테가 그 긴 시간 동안 <파우스트>와 씨름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자신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삶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작가의 삶을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다. 차라리 작가의 생각을 반영하다고 볼 수 있다. 삶에 비해 생각을 좀더 자유롭다고 봐야 하니까. <파우스트>를 통해 보이는 괴테는 그리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유명작가로서 보여지는 삶은 어쩌면  '그에 걸맞는 도덕과 지성'이라는 굴레를 씌웠는지 모르겠다. 그 굴레는 파우스트에게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유를 준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괴테는 파우스트도 메피스토펠레스도 지극한 도덕적 선이나 지독한 악의 근원에 서게 하지 못했다. 사랑에 너무 쉽게 무너진 대학자, 찌질한 사탄 이 둘을 동시에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이란 바로 우리 보통 사람이 아닌가. 괴테는 어쩌면 열심히 노력한 보통 사람으로 <파우스트>에 스스로를 숨긴 것이 아닐까?

 

 현실에 좌절한 사람은 어렵게 보이는 꿈을 쉽고 꾸고 쉽게 보이는 꿈을 어렵게 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실은 쉬운 것은 쉽고 어려운 것은 어렵다. 단순하다. 대부분의 <파우스트>의 등장인물들은 쉽게 정의된 그들의 개성 범위 안에서 그들다운 뻔한(단순한) 말을 한다. 단지 예외가 있다면 메피스토펠레스 뿐이다. 그가 악마라고 해서 괴테가 신화 속의 인물들을 차용하여 인간과 섞은 것은 아니겠지만 왜 2부에서의 <파우스트>는 꿈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야만했을까? 소설(희곡이지만 본질은 소설아닌가?)의 본질이 꿈같은 있을 법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허구이기 때문이라서?  아무래도 2부의 주인공은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 같다. 신의 섭리 속에 있는 존재이면서 끝까지 신의 섭리를 부정하며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정의하고 주장하는 모습은 어찌보면 인류사의 먹물들이 지속적으로 해온 것이 아닌가? 성경 속의 사탄은 인간의 욕망을 이성으로 풀어 원죄를 만들고 그 이성을 욕망으로 가로막아 죄를 유지하는 치밀함과 신의 아들마저  유혹하고 능멸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사탄은  신화 속의 존재들에게도 감히 맞서거나 그들의 영영에도 뛰어들지 못하고 기껏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사기 정도로 포르키아스들을 속이는 정도의 존재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암흑 때문이 신의 광명이 존재한다고 허풍을 떤다. 성경의 사탄은 인간의 이성을 농락하지만 <파우스트>의 사탄은 인간의 이성에 숨어서 그 전부도 아닌 일부와 거래하는 듯하다. 욥을 두고 한 내기에서 이미 진 바 있어 그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즉 실패를 경험했기에 자신의 불안과 허술함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악마다. 사실 <파우스트>에는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모두 괴테를 벗어나지 못한 괴테의 파편들이다. 그 파편들 중에 메피스토펠레스라는 귀여운 악마에게서 더 많은 자유의 메타포가 보이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책을 덮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괴테가 쓴 그것도 오랫동안 쓴 <파우스트>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것이 연극 배우들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는 희곡이 아니었다면 <파우스트>란 이 책은 독일을 벗어나 전세계인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었을까? 그리고 만약 18세기에 한류 바람이 불었다면  숙종 말의 하한담(河漢潭)과 최선달(崔先達)에게 최고의 전성기를 선사했던  《춘향가》를 비롯하여 《심청가》 《흥부가》 《토끼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 《화용도(華容道)》 《강릉매화타령》 《무숙(武淑)이타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 판소리 열두 마당과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국경을 넘을 수 있었을까? 재미로 봐서는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삶과 삶의 의미와 삶의 방식에 대한 스며드는 듯한 호소력으로 봐서는 후자가 더 매력있지 않나?   

   

< 욥기 vs 파우스트 >

 

<욥기>와 <파우스트>는  신과 악마의 거래, 삶의 주체성, 인간의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 등의 요소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공동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다양한 인문학적 첨가물은 <파우스트> 쪽이 훨씬 많다.아이러니 한 것은 성경의 욥기는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고 현세적인 보상을 결론으로 둔 반면 인문학적 구원이라고 평가되는 <파우스트>에서는 사후의 구원에 대해 신이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 욥기에 대한 두가지 관점

천상의 서곡 부분을 읽으면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바로 욥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을 두고 벌이는 수퍼네츄럴들의 이 고약한 거래에 화가 치밀 것이다. 욥기를 다시 읽었다. 내 속의 인문주의자는 역시  인간의 믿음을 두고 온갖 불행을 무기로 시험하는( 물론 시험하는 존재는 사탄이지만 그것을 허락한 이는 하나님이므로 방조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에게 정이 안간다고 말한다. 10명의 욥의  자식과 모든 재산을 다 몰수하여 그를 시험하고 그 시험에 통과한 욥에게 새로이 10명의 자식들을 주고 부와 명예를 다시 돌려 주고 장수로 복된 삶을 누리게 했다는 결말은 병만주고 약은 안주는 것보다 병을 주고도 약을 준다면 고마워할 것 같은 인간의 나약함이나 일종의 비겁함을 드러낸 것 같아 불편하다. 상식적으로 병을 준자와 약을 준자가 다른 사람이라면 약을 준자는 칭송을 받지만 만약 같은 사람이라면  설사 그가 약을 주어 생명을 빚지게 되었다할지라도 사람은 그 사람을 미워한다.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신지상정은 그렇지 않다. 만약 욥이 그런 미움을 가졌다면  그것은 사탄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실패한 믿음으로 낙인 찍힌다. 재산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을 잃은 아픔에 대해 새로 난 10명의 자식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전에 죽은 자식을 그대로 다시 살려 놓은 것이 아닌 다음에야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서의 장수는 자식을 앞세운 아비의 고통과 회환의 시간이 더 길어진 또 다른 형벌아닌가? 왜 하나님은 욥기가 성경에 등재되는 것을 말리지 않으셨는지... 그의 종인 욥이 한 말도 아닌 고난에 빠진 욥을 오히려 훈계하는 친구 빌닷의 입에서 나온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에 가지는 인간의 집착을 끊지 못하신 것은 아닌지...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이 거래를 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경의 욥기는 신의 인간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성경의 사탄은 욥의 믿음이 신의 은혜에 대한 반대 급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면 믿음은 사라지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의 소유물과 그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서 시험하나 넘어가지 않는다. 이 첫번째 시험에는 인간은 자기에게 직접 닥치지 않은 불행에 대해서는 설사 그것이 자식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을 흔들기에는  부족한 불행일 수 있다. 그래서  두번"째는 욥의 온몸에 종기가 나게하는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나 그 시험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네명의 친구와 쟁론을 벌이는 세번째 팩키지 시험을 통해 욥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 준다.  물론 욥의 대사는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라고 볼 수 있으나 스스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자각 속에서 자신이 모르는 범죄와 그에 대한 회개가 주를 이룬다. 신은 그런 욥의 믿음을 이미 알았기에 악마와 내기를 한 것인가?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욥이 보여준 것은 자신의 삶에서 만난 신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신뢰이며 자유의지에 기반한 인간의 주체적인 판단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욥기는 욥의 친구들의 말처럼 신의 축복이나 사후 징벌의 위협에 대응하는 반대급부적,혹은 굴복적 종속적 믿음이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 삶의 주체성을 신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기록한 장인 것이다.


-수퍼아이템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등장의 근거로 성경의 욥기를 인용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파우스트>는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되었을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방황의 모티브인 동시에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가 제공하는 신비적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꿈같은 일들이다. 회춘과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 쓰러져가는 국가를 일으키는 능력, 신화 속 여인과의 사랑, 전쟁에서 승리하는 영웅, 그리고 귀신을 부리는 능력 등은 남자들이 로또에 담첨되는 것 만큼이나 갖고 싶어하는 아이템들이다. 이런 아이템들이 간절에 지는 삶의 시기는 삶이 벽에 부딪힌 때일 것이다.그리고 그 삶의 벽이란 세속적인 삶의 성공 여부와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인간의 행복은 성공의 수준이 아니라 자기 성공에 대한 기준 혹은 욕망과 현실 사이의 차이(gap)에 더 많이 좌우된다고 하지 않는가. 괴테 역시 생전에 자신의 업적으로 인한 보상을 받고 간 인물이었지만 그에게 삶의 벽에 대한 자각과 고뇌가 없었다면   저런 수퍼 아이템들을 자기 이야기에 포함시켰을까?

이성의 획득이 원죄라면 이 원죄는 우리가 괴테 식의 수퍼 아이템을 공상 혹은 망상으로 치부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공상과 망상을 실현한 인간이 인류사에 있다는 것은 우리 이성의 지나친 원죄의식은 오히려 인간다운 꿈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이성이 꿈의 도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꿈이 이성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는 유치함보다 내 속에 있는 샘에서 나를 길러 내는 믿음이 지금 이 시점의 수퍼 아이템 획득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 메피스토펠레스를 이용한 괴테의 구원 >

 

독일문학과 괴테에 대한 공부가 깊으신 분들에게 괴테는 대가일지 모르나 그의 작품을 읽는 현재의 나에게는 그저 그는 내가 존경할 수도 있고 깔수도 있는 한 작가일 뿐이다.  이런 생각은 오히려 내 공부가 얕고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가능한 자유이다.

 

<파우스트>를 읽다 보면 신과 악마의 거래 장면에서는  <욥기>가 보이고 그레첸의 오빠를 죽이는 장면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보인다. 그리고 2부의 대부분의 장면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내가 만약 개입한다면?" 이라는 실험정신이 옅보인다. 이 작품을 원했던 당시 독일 민중 혹은 교양인들의 정신세계는 어떠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어릴 적 난해함이 표절 의혹으로 발전하다니... 반쯤 찬 나의 깡통이 우습기도하고 무섭기도 하다.

 

욥기에 비해 <파우스트>에 진화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재발견이다. 욥기의 악마는 악의 본성인 단순 가해자에 지나지 않는다. 욥의 모든 소유물을 앗아가고 자식을 죽이고 욥에게 온몸의 종기라는 고통을 주는 것이 전부다. 창세기의 뱀이 보여주는 사람 사이에 당연히 있을 법한 것으로 인간을 유혹하는꼬드김의 명수다운 면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페피스토펠레스는 창세기의 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가 파우스트의 종이 되기를 자처한다. 신과 대적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물론 가식적일지라도) 인간의 종노릇을 자처한다는 것은 막강한 능력으로 어둠과 공포와 협박 죽음을 들이대며 인간을 버러지마냥 휘두르는 그런 중세의 악마와는 많이 다르다. 인간 사회의 근대화와 더불어 악마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일까?

 

 괴테의 의도는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보여진다. 성경에서의 인간의 위상은 하나님 다음이다. 천사들이 인간 이전에 존재했을지라도 신약시대 이후에 지옥과 천국을 가리는 열쇠는 베드로라는 청지기에게 맡겨졌다. 악마 역시 타락한 천사이므로 그의 지위는 인간 다음이다. 괴테는 이를 광명의 하나님과 암흑의 사탄 그리고 이 둘을 다 가진 인간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을 선과 악의 가교로 묘사하는 동시에 악마를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지위에 올려 놓았다. 선과 악의 가교로서의 인간은 세속적이지만 광명과 암흑의 가교로서의 인간은 우주적인 중요성을 지닌 존재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와도 맞닿은 괴테의 안배라고 보여진다.또한 선악의 양면을 가진 인간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이 선택은 창조주로 부터 주어진 자유의지의 발로이며 이는 인간의 주체성을 가장 성경적으로 함축하는 구도이다. 통상 이런 구도라면 신약 성경의 한구절 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하듯이 인간의 악행은 사탄에게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에게 그 영광을 돌리면 그만인 구도로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괴테는 파우스트 스스로 구원의 고백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사랑(책에 묘사된 성모와 마리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의 본체인 예수와 직결되는 통로이다)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장면을 만듦으로써  믿음도 은혜라는 지극히 성경적인 회귀를 하고 있다. 이는 모양은 틀려보이지만 지극히 <욥기>적인 회귀이다. 이것을 인문주의적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정통적인 기독교의 구원 과정인 회개와 죄사함의 과정이 <파우스트>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이는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마지막 대사 "멈추어라,너 정말 아름답구나.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 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는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천국 소망)는 맥락과 맞닿아서 악마를 속이는 회개요 순교를 앞 둔 최후 진술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 역시 너무나 성경적이다. 때문에 괴테는 자신의 욕망적 죄악에 대해 신적인 구원의 소망을 담고 평생 산 남자였을 것이다.

 

인간은 현세의 복을 두고 신과도 거래하고 악마와도 거래하는 위험한 존재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면 죽음 이후의 불가지의 세계에 대해서는 단연코 신과의 거래를 택한다. 또한 때로는 스스로 구원하는 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신론자가 됨으로써  죽음 이후의 불가지를 불가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기회주의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과 맞닿아 있다. 죽음을 막다른 벽으로 볼 것인지 죽음을 또 다른 나의 관문으로 볼 것인지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후자라면 영적인 힘에 대한 자각이 내 삶의 어느 한 순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 파우스트적 방황>

 

 파우스트 아니 괴테는 왜 대학자로서의 지적 호기심과 그 탐구의 여정을 택하지 않고  사랑과 세속적 성공의 욕망을 기웃거리는 여정을 택했을까?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라는 대사는 <파우스트>의 주인공으로선 지나치게 베르테르적이고 궁색한 변명처럼 들린다.

 

파우스트적인 방황을 사회적 제약의 굴레를 쓴 먹물들의 일탈 욕구라고 정의하면 어떤 변명들이 만들어질까? 일단 먹물이 되려면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호기심에는 기능적 호기심과 먹물적 호기심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매뉴얼에 대한 지식 즉 직무 지식이거나 조작적 지식이 그 대상이다. 먹물적 호기심은 진실 탐구를 목표로 하는 기자적 호기심과 진리탐구를 목표로하는 학자적 호기심 그리고 자기 가면의 완성을 목표로하는 백수적 호기심(백수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백업의 노력)으로 나눈다. 기자적 먹물은 자기 일탈을 진실탐구를 위한 체험적 자기 희생이라 변명할 수 있고 학자적 먹물은 자기 일탈을 진리 탐구를 위한 자기 파괴라 변명할 수 있다. 백수적 먹물은 자기 일탈을 존재양식의 변화를 위한 실험 혹은 새로은 자기 가능성의 발견이라 변명할 지 모른다. 교양이라는 먹물은 대체로 백수적 먹물이다. 어쨌거나 파우스트적인 방황이라 소제목을 따고도 앞으로 더 나아가기가 참 궁색한 장면이다. 그러나 여성적인 것에 의한 이끌림에 의한 방황이라면  이 방황은 너무나 통속적이면서 지독히 개별적인 방황이 된다.

 

파우스트가 글레첸을 처음 보았을 때를 한국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적요 시인이 은교를 처음 보았을 때일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누구나 나이에 상관 없이 찾아 오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기대를 감추고 산다. 아마 <은교>의 이적요는 너무 늦게 찾아온 그 사랑 때문에 메피스토펠레스를 혹은 도리안 그래이를 절실히 아주 간절히 희구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등장했다면 <은교>는 <여고괴담>이 되었을 터이고 노쇠한 시인 먹물의 순수한 사랑과 욕망의 좌절이라 여정으로 한국 사람들의 사랑의 감성을 달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파우스트>도 <은교>같은 결말이었으면 딱 좋았다. 파우스트는 헬레나를 사랑하는 것까지 가지 말았어야 했다. 헬레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또래의 남자들이 휴지통을 옆에 끼고 실비아크리스텔을 사랑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사랑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사랑을 욕망으로 풀어버린 굴복이요 남자의 사랑의 값어치를 폄하하는 굴욕적인 장면으로 뛰어든 것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적 방황에 구원이라는 주제가 없다면 파우스트의 2부는 사족 덩어리다. 그리 보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참으로 긴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면서 결말을 만든 어쩌면 위험했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방황은 시기과 기간이 참 중요하다. 방황이 약이 되는 이유는 그것을 벗어난 곳에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지점이 파우스트처럼 죽음의 직전이 되어서는 안된다.

 

 

 


<에필로그>

 

'어렵다'란 감상 외에 달리 남은 것이 없는 어릴적 기억 때문에 <파우스트> 풀이집을 먼저 읽고 다시 시작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중간 중간 책을 덮을 때 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이 내 나름으로 <파우스트>를 갈무리할 수 있게 해 준것 같다.

 

사실 '작가란 자연이 베풀어 준 인간의 권리'라는 문구에서 부터 괴테의 수사는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오류 투성이에 진리란 단 한 번 반짝일 따름'이라는 문구에서는 그의 삶에 대한 공력과 통찰을 느꼈다.  그리고 '대담하고 우아하게 이미 익숙해 있는 현악을 연주하며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하여 즐겁게 방황하며 소요하는 것이 노인장, 당신네들의 의무 올시다'라는 문장에서는 알지 못할 희망감을 맛보기도 했다. '인간이 이성을 짐승보다 더 동물적으로 살아가는데만 쓰고 있다'는 충고는 도덕 교과서 한권을 한줄로 요약한 듯한 시원함이 있었다. '정령들의 세계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오관이 닫혀 있고, 네 마음이 죽었노라'라는 말은 현실에 매몰된 내 정신의 각성을 촉구하는 잠언처럼 느껴졌다.

 

괴테, 절대 깔볼 수 없는 이야기꾼이다. "자네들이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도 근본적으로는 여러 현자들 자신의 정신으로서 그 속에 여러 시대가 반영되고 있는 것일세 " 이 말에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이 없다고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공상이란 평상시에는 대담한 날개를 펴고 희망으로 부풀어 영원까지 확대되다가 기대했던 행복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달아 패하면 이젠 조그만 공간으로도 만족해 버리고 만다'는 문구에서는 벌써 내 삶에서 나이를 셈하고 있는 못난 모습을 꾸짓는 듯한 선배의 정을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기적이란 믿음이 낳은 가장 사랑스런 자식이다'고 첨언까지 해주니 용기가 절로 솟는다.  <파우스트>를 읽고자 했다면 건지지 못했을 보물이다. 괴테를 읽으려 했기에 건져올린 월척을 탁본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는 밤이다. 

 

 

<Post Script>

 

호물쿨루스는 과연  빛의 존재이고 파우스트의 지성을 이어받은 바그너가 꽃피운 인문정신의 정화일까?
호문쿨로스라는 등장인물에는 해결되지 않는 여러가지 복선이 존재한다.

 

그 첫째는 인간이 창조한 생명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불완전하다. 정신은 있으나 몸이 없다. 인간을 원소적 결합으로 보았을 때 호문쿨루스는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생겨 나야했음에도 반대의 결과가 생겨났다. 이것은 신의 창조외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  

 

그 둘째는 신적 안배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지식도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을 통해 얻어진 것이고 보면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신의 안배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호문쿨로스는 이미 내재된 듯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좀더 기독교적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하나의 영에 연결된 모든 사람이 가진 영의 가시적 표현이다. 각 개인이 가진 영의 크기는 그의 삶이 반영된다. 영적인 삶을 살아야지 그 영이 성장하는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인간의 정신의 요체인 호문클로스로서는 불완전하나 완전해 보이지만 오리포리온으로 육신을 찾은 호무쿨루스는 오히려 길들여지지 않는 욕망을 따르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표현된다. 괴테는 인간의 정신을 순수의 영역에 육체를 욕망 즉 죄의 영역에 두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세째는 악마적 안배라는 점이다. 호문쿨루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호문클로스가 헬레나와의 연결점인 동시에 헬레나와의 이별의 원인(오리포리온을 호물쿨루스의 현신으로 본다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할 때 두 번째 주문이 바로 네가 신의 아들이거든 높은곳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적으로 보면 오리포리온은 이카루스의 현신이지만 신약적으로 보면 바로 그 두 번째 시험의 재현이요 사탄이 바라는 결론의 시연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우스트>에서의 호문쿨루스의 대사나 역할은 파우스트를 이끈다기 보다 오히려 메피스토펠레스를 이끄는 측면이 더 많다는 점 또한 악마적 안배라는 추측을 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