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아카데미 수강록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 경희 대학교 서동은 교수 강의 -
기대가 컸던 탓일까? 아쉬움이 많은 강의다.
책을 주제로 강의를 할 때는 잘알려지지 않은 책일 경우 그 책의 가치와 내용을 상세히 전달하는 것 만으로도 많은 감동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잘알려진 책일 경우는 그 책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깬다든지, 책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재조명한다든지, 책을 통해 저자에 생각과 의도를 밝혀본다든지 아니면 독특한 시각으로 책의 내용을 재해석 함으로써 보다 많은 공감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책을 요약하고 그것을 TV 대담프로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좀은 식상한 개인적 경험의 비유로 강의한다면 강연자가 의도한 목적과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에릭 프롬의 사랑에 대한 정의와 기술 그리고 강연자의 사랑에 대한 철학 단상을 제시함으로써 청강자들이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강의의 목적이라고 했는데 이번 강연은 크게 보아 그런 강연자의 목적에 해당되는 내용이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음에도 청중의 입장에서는 아쉽기만하다.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강연이라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는 것이 부담되어 그리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랑의 기술>을 풀어 내는 방법과 방향 잡기가 잘못되거나 서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고전이라 하기에는 세상에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햇병아리도 못되는 책이다. 1956년에 세상에 나 왔으니 우리에게는 6.25에 대한 기억보다 가까이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세상에 나오면서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책이다.책이 출간된지 10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원판 인쇄가 40쇄가 넘었고 34개국의 언어로 번역 출판된 것 까지 포함하면, 요즘 말로 월드와이드 베스트셀러에 스테디 셀러인 셈이다. 그리고 이 책이 있었기에 그로부터 20년 쯤 후에 레오버스카글리아의 < LOVE>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등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물론 두 책의 거리는 멀다. 프롬는 자아를 찾기 위한 사회 심리학적 분석과 그 서술이라 볼 수 있지만 버스카글리아의 책에서는 프롬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공감적 감성을 담고 있다. )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왜 이 책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애게 읽혀지고 관심을 받았을까?"라는 것이다. 에릭 프롬의 생몰 연대를 근거로 보면 그는 두 번의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겪었고 또 이념으로 인해 세계가 양분되는 것을 직접 목도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논리로 인해 인간성이 상실되고 인간이 사회로 부터 분리되고 수단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는 3번의 결혼을 통해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있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많은 의미를 구체화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처함 상황을 철학적이거나 사회심리학적 고찰을 할 수 없었을지는 몰라도 그 경험 만큼은 프롬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파괴와 좌절, 소외와 물질만능주의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고 이는 점점 그들을 혼돈으로 몰고 갔을 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 이라는 단어 상투적으로 붙는 추상적인 어떤 단어가 아닌 '기술'이라는 구체적인 단어가 붙은 제목의 이 책은 그들에게 호기심을 던져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의 내용은 '사랑'이 존재의 본질과 연루되어 있음을 아주 논리적으로 그들을 설득시켜주는 것이고 고 또 이런 '사랑'이 배우고 실천하면 이룰 수 있는 대상이라 말해 주니 물질주의적 공허함을 채우려는 욕구를 가진 대중에게 처세적 성공학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을 가져다주는 성공학처럼 비치지 않았을까? 그저 내 생각일 따름이다.
<사랑의 기술>을 풀어 내는 방법은 실존이라는 철학적인 밥에, 분리 불안과 그 극복이라는 사회심리학적인 국에, 수평적 관계의 지향과 인격의 다양성의 인정과 자아발견을 위한 실천적 노력 등의 반찬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집중과 관심이라는 수저를 드는 것이다. 이 말은 이 책은 공부하면서 읽어야 하고 또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생각하지 않는 다면 이 책은 성경과 오늘날의 대중적인 사랑 개념 혹은 성경과 프로이드의 중간 어디 쯤에 있는 그렇고 그런 책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에렉 프롬 특유의 논리 전개를 감상하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만약 책이 아니고 이 내용을 에릭프롬이 사적인 자리에서 들려 주는 삶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그에게 설득 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논리는 정연하고 또 그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뛰어난 설득력을 가진다. 에릭 프롬은 자기가 사용하는 어떤 개념의 정의와 그 정의의 근거를 합리적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어떤 개념이나 상황에 대한 그의 주옥 같은 언명들은 따로 떼어 내어 곱씹어 보고 자기나름의 생각주머니를 꿰어 찰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이 책의 맛이 우러난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기술>의 핵심을 노래 제목으로 꿰면 이렇다.
<존재의 이유><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사랑은 아무나 하나> 이 정도 아닐까 싶다.
사랑이 <존재의 이유>인 이유를 에릭 프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본능적 세계에서 벗어 났다는 것이며 이는 자연과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실존론적 정의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에덴 동산(어쩌면 자연의 본능적 영역인지 모른다)에서 분리된 것,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 된 것은 어쩌면 자연과의 전인간적인 조화 대신에 스스로 구분지음으로써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분리된 것이다. 이런 분리는 무력감과 죄책감 불안의 원천이다. 이러한 분리 불안을 극복하는 해법으로서 여러가지 합일의 시도하고 경험하는 역사가 있어 왔으나 인간이 발견한 유일하고도 완전한 해답은 인간적인 결합의 완성인 사랑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가 맞는 이유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으로 능동적인 활동이라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사랑을 강요한다고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실존의 해법으로서의 사랑은 누가 주는 것을 받아서 갖추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발견을 통한 개별적 개달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은 절대 받는 것만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은 받아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써 커지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잠재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며자기 자신 안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활동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다면, 달리 말해 스스로 생명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실존은 더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관계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동류인 인간에 대한 사랑, 즉 동족에 대한 생명의 공급을 멈추는 것 역시 인간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사랑은 본질적으로 주는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상식적인 답변은 <아무나 한다>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은 대게 남녀 간의 운명적 만남과 결합이었기에 사랑을 흔하고 쉬운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무나 사랑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의 감정과 그 표현이 개인의 불가침 영역 속의 배타적인 자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실존적 사랑은 남녀간의 애착을 넘어서는 무엇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말에 포함된 보호와 책임과 존경이라고 에릭 프롬은 주장한다. 사랑이란 말에 이런 의미가 있는 줄 모른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상태임을 말한다. 대문에 사랑은 배움이 필요하다. 배움이란 지식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단지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위해 실천되어져야 하는 활동이므로 사랑은 기술이다. 기술이기 때문에 학습할 수 있고 학습할 수 있기에 보다 높은 단계로 고양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이 에릭 할아버지의 말씀을 대강의 요약이다.
이 할아버지에게 사랑은 인간 실존의 해답을 찾기 위한 구도적인 과정 처럼 보인다.이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그야말로 제대로된 사랑을 하려면( 다시말해 인간 실존의 해답을 얻으려면) 겸손과 객관성과 이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해 사랑을 주어야만 한다.이 박애주의적인 느낌이 에릭 프롬의<사랑의 기술>을 실천하는 것에 거리감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본다. 최근의 독서와 연관되어서 한 가지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는 사랑의 논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주는 만큼 받아야 하고 받는 것보다는 조금 모자라게 주어야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사랑이다. 내 생각에도 거래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는 이런 시장 논리에 오염된 사랑의 논리에 너무 익숙하다.
사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도대체 이 할아버지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 아마도 열정적이기보다는 진지하고 보수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사랑을 느끼는 여자는 아마도 교양있고 생각할 줄 아는 여자일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에 정말 등장하지 않는 단어가 '행복'과 '감성'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다보니 에릭 할배의 <사랑의 기술>은 너무 딱딱하거나 원칙주의적이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자신의 앞에 놓인 사랑과 그 경험이란 안경으로 모든 사랑을 투사할 때 에릭 프롬처럼 누진 다초점 안경을 쓰고 사랑은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되어야만 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사람 쯤 필요한데 바로 그가 에릭 프롬이다. 에릭 할배가 이 책에 적은 잘못된 사랑의 예들이 때로 우리 현실에서 다양한 사랑의 한 단면으로 둔갑되기도 하는데 다양성의 인정과 원칙의 붕괴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조심히 건너야할 위험한 난간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에서 찾은 주옥같은 언명들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덧글을 붙여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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