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et>
- 수전케인 지음 -
책은 만남을 기대하게 합니다. 책의 저자와도 만나고 책 속의 주인공들 그리고 다양한 삶을 만납니다.그런 기대가 만남을 설래게하고 또 그런 기대의 충족이 책을 지속적으로 만나게 하는 힘이되기도 합니다. 책과의 만남을 자주 하다보면 모든 기대가 반드시 충족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배신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배신감은 기대의 크기에 비례하고 또 상당히 오래 각인되기도 합니다. 그로인해 독서의 편향이 생기고 책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독서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책에 대한 나름의 평가와 결론은 내리는 작업은 책 읽는 사람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책에 평가는객관적일 것이라 스스로 믿고 지지하는 주관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 집니다. 그러기에 서평은 분석적이고 비판적일 수 있으며 비난과 폄하의 잣대를 갖다 댈 수도 있습니다. 분명 비난의 대상이 되는 책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책과의 만남이 기대에 못미친다는 이유로 잘못된 만남의 이유를 책에서만 찾는 것은 너무 일방적이어서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가 기울인 땀과 노력이 옅보이는 책의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도 그런 책이라 생각됩니다. 책의 곳곳에 열정과 노력의 흔적이 보입니다. 우리가 책과 '사리'를 결부시켜야 했던 이유가 올해 첫 토론에서 만나게 되는 책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은 아닐까요?
<콰이어트>에 대한 독서 토론을 마치고 돌아와서 정리할 필요성은 있는 책이다 싶어 다시 한 번 간독해 봅니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것 처럼 다소 중복되고 지루한 사례의 열거가 목차에서 보여 준 탄탄한 주제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강의 동영상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책에서도 썼지만 그녀는 그 강연을 상당히 준비한 듯 하고 또 오래 동안에 걸처 여러 번 한 듯이 보입니다. 강연 속의 수전 케인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열정과 깊은 지식과 또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완벽에 가까운 프리젠테이션을 선사했습니다. 그녀의 프리젠테이션에서 좀더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싶은 부분만 보강하여 읽을 수 있게 해주었더라면(그 정도의 분량이었더라면) 이 책과의 만남은 강렬한 긍정적인 인상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책을 <Quiet> 가 아닌 다른 제목을 붙이다면 <내향성의 재발견 New exploration of Introvert>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향성이나 내향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사회적 관념이나 평가가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느낀 필자가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향성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고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흐름입니다. 그녀가 느낀 왜곡은 외향성이 내향성에 비해 우등하다고 느끼는 사회적 통념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이 리더십이 있고 긍정적이며 사교성이 있다고 평가를 해왔는데 그것이 반드시 외향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많은 사례들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바꾼 위대한 고집을 가진 사람들, 역사 속에서 창의적이라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당대의 많은 사회적 성취를 이끈 사람들 중에 내향성을 지닌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반대로 내향성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내향성와 외향성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다만 타고난 기질은 유전자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기에 자신이 물려 받은 것과 반대되는 성향의 행동을 추구하는 것이 타고난 기질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양한 사람들 만큼이나 한 개인이 보여주는 내향성과 외향성 정도도 다양할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동시에 상황적 동물입니다. 그러기에 보여지는 내향성과 외향성 만으로 그사람의 진정한 성향을 단정짓기는 힘들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나와 타인의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고 배려한다면 나와 그들에게 사회 통념적 선(善)을 강요하지는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은 때때로 억압적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에게도 부담스러운 세상입니다.
책에서 공감 가는 몇 가지 흥미로운 주장들을 발견했습니다. 좋은 성격이란 개념을 외향성에 국한되어 사용하지 말아야겠다는 것,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함으로써 내가 만족하는 내가 아닌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이 개인의 불안과 공허감을 가속시킨다는 점. 유야기에 외부 자극(알콜 냄새)에 고반응성의 아이들이 커서 진지하고 조심스런 내성적인 성격이 되고 저반응성 아이들이 느긋하고 자신감있는 외향적 유형으로 자랐다는 실험 결과는 내가 가진 상식에 반하는 것이어서 다소 의외였지만 한 단계 더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와 내 주변의 사람을 비추어 생각해보는 내성적인 사람이 자극에 반응은 민감하지만 표현이 작고 느린 것이고, 외향적인 사람은 자극에 둔감하지만 인지된 자극에 대한 표현이 크고 빠른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졌습니다. 또 하나 더 나의 상식적인 생각에 반대되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이 긍정적인 감정이 강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반사회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관한 기술이었습니다. 저자는 열광이 우리가 주의해야할 경고를 무시하게되는 원인이 됨으로써 과도한 위험과 연결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보통 연쇄살인범과 같은 사회적인 충격을 주는 범죄자들이나 총기 난사 사고를 저지르 사람들이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충격적이다'라는 언론 보도를 자주 접합니다. 그래서 저도 '내성적인 사람이 폭발하면 더 위험하구나'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저자의 주장은 열광하기 쉬운 외향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더 충동적으로 반사회적 행동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조였습니다. 이 역시 나를 들여다 보니 그럴 법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 생각해보면(저는 아는 체 하기 시작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쓰는 것 같네요 ^^) 성경에도 외향성의 폭력성을 성경의 아주 앞부분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카인은 농사꾼이고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카인은 농사의 소산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동생 아벨은 양을 바칩니다. 그러나 얄궂은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지요. 그러자 화가 난 카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다 아는 내용인지라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카인의 외향성은 그가 바로 농사꾼이라 점에 있습니다. 농사는 하늘이 허락하는 것을 그저 기다리므로 내성적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농사꾼이란 직업은 씨도 잘 골라야 되므로 자신의 안목도 길러야 되고 농사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적 제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농사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일단 농사는 짓는만큼 결과가 있기에 사람이 좀 느긋해 질 수도 있겠지요. 반면에 목동인 아벨은 그저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활용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적극성은 카인의 한 수 아래가 되겠지요. 또 좋은 목초지를 찾아야 하고 양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혹은 맹수로 부터 지키기 위해 양과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나 일기의 변화에도 농사 보다는 더 민감해야 하므로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합니다. 더우기 양을 양식으로 쓰기 위해서는 젖을 짜는 법도 알아야 하고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본의 아니게 기초적인 해부학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아벨은 천상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민감하고 진지하고 조심스럽고 고반응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과정도 두 성격의 차이를 대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맥으로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먼저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카인은 발끈하고 그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가 화내는 것을 질책하는 하나님에게 더 화가 났던지 동생에게 "너 좀 따라와!"하며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 죽이게 되는데 아벨은 형이 그러니 고분고분 따라갔을 것입니다. 견강부회라 생각되지만 이처럼 외향성과 내향성의 갈등은 역사가 오랜 것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외향적인 사람은 보상에 민감한 편이고 내성적인 사람은 경고에 민감한 편이라는 것도 카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상에 민감했으니까요.
아직 한국 사회는 인격의 문화에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우리 사회도 점점 성격의 문화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직 우려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우리 민족의 학습 저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체면'이라는 사회 문화적 현상을 품에 안고 살아왔기에 체면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체면은 일관적 지향성을 말합니다. 타인의 눈길을 따르는 삶은 지치고 피곤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길을 따르는 삶은 만족과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기부와 선행의 삶을 사는 연예인과 자살하는 연예인의 인터뷰 내용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대체로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은 눈길과 마음길을 적절히 잘 교차시킬 줄 아는 사람들일테니까요.
지금 조용히 이 책을 덮으면 다시는 조용히 열어 보지 않을 것 같아 조용히 정리해봅니다.
하지만 그녀의 강연은 다시 보기를 할 것 같군요, 말이 너무 빨라서 놓친 부분이 많아서리...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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