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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잉여사회> -최태섭 지음-

 

<잉여사회> -최태섭 지음-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왠지 반어적으로 쓰인 것 같은 잉여 그리고 접미어처럼 붙어 있는 사회라는 단어에서 뭔가 시스템적인 냄내가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색다른 시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바램을 다 채워주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아는 '잉여'라는 단어는 축적의 대상이었고, 교환의 원천이었으며, 부의 원천이었다. 그것이 반대로 돌아서는 것은 과다 잉여 즉 과잉의 경우가 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흔해져서 가치가 하락하거나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흔한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잉여가 문제시 되고 잉여가 많들어 내는 의미없는 문화들이 그저 변화의 한 양태이거나 현 사회를 반영하는 흐름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잉여를 전체 시스템이 만들어 낸 구조적 산물로 정의했고 그 잉여들의 존재방식이 유령이나 좀비의 특징을 닮아 있다고 정의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 내는 생산성 없는 각종 이슈들을 사회적 현상이나 변형된 문화의 형태로 적고 있다.

 

저자가 정의 하는 '잉여'에 대한 문장을 옮겨보자.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와 집중의 산물이고,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잉여는 스스로를 인질로 삼기는 커녕 자신의 생존을 세계에 저당잡혀 있는 존재다..... 잉여들의 패배는 당연한 일이고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즉 잉여의 태생이 과거와는 달라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들 잉여는 사회적 패자 혹은 약자가 되기 위한 운명이고 그것에 대한 대응은 체념이라는 논조다. 그리고 이들 잉여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다. " 그것은 어떤 (무)능력이 될 수도 있고 사람 자제가 될 수도 있으며, 슬모 없어진 공장이나 국가가 될 수도 있다. 전통, 관례, 풍습, 제도 잉여화의 길을 피해 갈 수는 없으며, 사상이나 이념, 철학도 그렇다"라고 정의 한다. 그리고 저자는 잉여화의 길은 새로운 자본주의 체재 내에서 '효율성'을 갖는가에  따라 갈리며 비효율이 우리시대의 악으로 자리 잡았다고 표현한다.어찌 보면 구구 절절이 맞는 말이다. 자본의 세계에서는 틀릴 것이 없는 말이다. 삶과 가치 그리고 다양성의 문맥에서는 다소 어색한 곳이 있지만....
 
저자 본인은 머리 속에 잉여에 대한 해법이 있을 것처럼 보이나 이 책에서는 그리 시원한 대답이 없다. 생존하고 성장하고 진정한 자신을 만난 우리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잉여가 가능성이라고 뜬금없이 건너 뛴다. 아마 잉여들의 반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저자가 인용한 문구를 인용하면 "반란은 부를 기초로 해서만, 즉 지성 경험 지식 욕망 등의 잉여를 기초로 해서만 나타난다"라는 타인의 주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한 개념적 해법과 프로세스가 기술되지 않아 아직 잉여를 가지고 해법을 제시할 정도로 공부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여하튼 그가 의도한 것은 무가치한 잉여에 저항하라는 것이라는 것은 감이 잡힌다. 쓸모있는 잉여가 되는 것은 잉여가 생존하는 기본 원칙이다.

 

성공을 꿈꾸며 자기주도적 학습을 통해 성취지향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선을 지향하며  삶을 꾸려 온 사람들이 어느날 자신이 잉여가 되어 있는 아주 쇼킹한 상황에 처한 어떤 개인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나름 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내 탓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런 상황에 처한 자신의 분노와 열정이 어디를 향해야하는 지에 대해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전체 시스템의 변화 같은 것 말이다.

 

이 책은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일어나는 잉여스러운 짓들에 대해서도 나름 충실한 설명을 하고 있다. 나이로 보면 기득권층일 나에게 요즘 잘 이해되지 않는 '젊은 것들이 하는 짓거리'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잉여의 특징을 오드라텍과 연결지은 점이다. 오드라덱(Odradek) 은 프란츠 카프카의 짧은 단편 <가장의 근심>에 나오는 기묘하고 수수께기 같은 존재다. 오드라덱이라는 이름의 기원도 모호하다. 카프카의 묘사에 따르면 납작한 별모양의 실패처럼 생긴 그것은 뜬금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뜬금없는 곳에 존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름을 물으면 대답도 잘한다. 하지만 알수 없는 존재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잉여는 바로 그런 존재라는 설명인데 오드라덱은 자신의 결핍이나 과잉으로 인해 찌질하게 보이지 않으려 스노비즘적인 행동을 한다고 한다. 가끔 내가 아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았다. 스노비즘... 아니 이 말은 내게 아주 적합할런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