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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허수아비의 춤> - 조정래 -

 

<허수아비의 춤>

 

<정글만리>를 읽고 토론을 했었다. 다른 회원들은 칭찬과 감탄을 쏟아내었고 예전 같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에 미칠 법한데도 탄수화물로만 된 식사를 몇 끼 한 후에 화장실에 다녀올 때 겪는 그런 상쾌하지 못한 기분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건 찝찝함이라기보다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혹시나 싶어 김치도 챙겨먹고 식후에 과일도 먹어 줬는데 해우의 기대가 무산되어 버린 경험의 재현이었다. 언론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또 판매부수도 1등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좋은 소설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반론을 무대뽀로 뱉어내고 내가 맞는다고 마구 우기고 싶은 그런 심정이라고 해야 하나? 조정래의 전작에서 얻었던 것은 인간과 삶에 대한 치밀하지만 선이 굵은 묘사와, 주제와 어우러지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공감 가는 엄중한 평가를 내리는 의식있는 작가의 풍미였다. 그런데 <정글만리>는 왠지 무언가 아쉬웠다. 아마도 비즈니스라는 부분 때문이라 생각된다. 책 속에서의 비즈니스가 장사치들의 농간 정도를 넘지 못하는 미진함이 있다 느껴졌고, 성공과 실패라는 선이 굵은 흐름보다 경쟁에서의 살아남기위해 안간힘으로 뭐든지 해야만 하는 군상들이 그려졌기에 그랬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정글만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촉진한 것은 댓 번 다녀오면서 체득한 중국에 대한 나의 지식을 크게 넘지 않는 사실들이 사용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도 나는 조정래 작가에게 행간을 읽어서 혜안을 열어주는 기대를 했었나 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주목하여 꿰미가 엮여진 듯 했고 그 결과로  파도를 보여주고 해류를 언급하지 못한 형국으로 내게 비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을 한 번 더 읽고 싶었다. <태백산맥>을 읽은 지 꽤 되었기에 다시 잡아 볼까 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분량이 만만치 않았고 다른 장편들을 고르다가 단행본으로 된 장편이 손에 잡혔다. <허수아비의 춤> 삼성과 현대 정도가 모델이 되었을 법한 기업 소설, 아니 기업을 소재로 돈에 의해 춤을 추고 있는 인간들과 돈으로 갈라지게 된 우리 사회의 어떤 양극화를 그린 소설이다.  조정래표의 문체나 글의 전개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했지만 유달리 제목에서 걸리는 게 많았다. 허수아비 말이다.

 

대게 아비는 남자 어른에게 그 책임감을 인정해주고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북돋아 줄 요량으로 쓰는 호칭인데 아들 잘못 둔 탓에 허수아비는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아비가 되었다. 빈손아비,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바보 같은 놈의 아비니 아들 보다 더 못난 놈이란 경멸이 베여있는 말이다. 그런 허수아비가 일한답시고 들판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양새란 얼마나 가관이겠는가. 지난 내 삶을 되새김질해보면 2년 허수아비 노릇에 10년 허수가 되었고 이제는 색마저 바래버렸으니 자화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괜한 동지애가 생겨날 지경이다. 원래 허수 아비는 곡식이 익어가는 들녘에서 농부들의 풍요를 지켜주는 논밭의 장승 역할이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약탈자인 참새떼들에게도 날개를 쉴 수 있게 하는 여유로움의 상징으로 만화에 많이 등장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 책을 덮는 순간 그런 낭만은 다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갑자기 허수아비에 담긴 소작농들의 비애가 떠오른다. 지주들이야 정해진 세경 꼬박꼬박 챙기면 되는데 남은 곡식으로 가솔을 책임져야 할 아비들은 허수가 되지 않으려고 한 톨의 곡식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어 그들이 부재중에 발생하는 불상사를 막으려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드니 억장이 무너진다. 다섯 살 무렵인가 거창에서 살 때에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들녘에 메뚜기 사냥을 나갔고 동시에 할머니가 쥐어주는 바가지에 이삭을 줍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내가 쌀밥 한 그릇 퍼가서 꽁보리밥으로 바꿔 먹던 집의 당시 국민학교 고학년 쯤 되던 누나는 이삭을 훑어 들판 가운데 설치한 광주리 덫에 뿌리고는 멀찌감치서 광주리를 세운 막대기에 묶은 끈을 잡고 있다가 참새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그 누나는 내 손을 잡고 작은 강둑을 걸어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곤 했다. 문제는 아련하고 그리운 이런 감상적인 내 유년기의 회상의 장면에 숨겨졌던 것이 이 책을 통해 떠오른 것이다.  바로 그 강둑에 방치되어 있었던 화형 당한 허수아비의 잔해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새를 쫓는데 크게 쓸모는 없지만 그나마 가난한 이들의 아등바등한 염원이 담긴 허수아비의 최후는 화형이었던 것이다. 아니다. 화형은 너무 잔인하니 화장 정도로 해두고 싶다. 하지만 화장이라 할지라도 아들 허수가 있었다면 너무나 허망한 아비의 죽음은 낫자루 하나 들고 온 마을을 난도질하며 다닐만한 일이다. 허수가 빈손이었기에 망정이지...여하튼 용도 폐기된 허수아비의 최후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 만은 분명하다. 물론 픽션일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이 책은 내 유년의 기억을 오염시킬 만큼 허수아비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혹은 동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든 것이다.

 

<허수아비의 춤>을 처음 읽었을 때는 '허수아비의 춤'이란 것이 소위 로열패밀리들이 가진 돈이란 무기 앞에 굴종하는 인간들의 몸부림 정도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고 보니 그들 로열패밀리란 인간들도 돈에 놀아나고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돈을 매개로 필요한 인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위적인 인간관계를 자기 부의 영속을 꾀하는 것에 이용하려는 일광의 회장을 통해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재벌들의 행태를 꼬집는 면도 있다. 그리고 그 돈놀음에 놀아나는 민중의 지팡이들과 법과 질서의 파수꾼들에 대한 이야기도 어느 신문에서 본 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특히 돈이 오가는 행정조직의 실무 담당자들의 이야기는 액수의 차이일 뿐 우리 사회가 아직도 돈을 가지고 법이나 사회정의의 구속에서 벗어나보려는 다양한 국민들이 있고, 그 국민들을 상대하는 국민들의 심복이 있으며, 단지 그 심복들이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갑을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강기준이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나를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었다. 내가 30중반의 나이에 세상에 대한 나의 포부와 삶의 원칙을 좀더 고민하고 살았더라면 연봉 얼마에 움직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를 하게 한다. 책에 기술된 기업들이 대충 우리나라의 대기업을 상징한다고 보고 현대 삼성 GS LG를 열거하고 이들 회장의 성을 열거해보니 정,,,구다. 재벌들이 말하는 경제 정의란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물론 나는 그들 개인의 인격을 모르고 하는 소리소 그들이 허수아비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작가의 말이나 서평에서 이 책의 집필 목적이 경제민주화를 구현하자는 데 있다고 한다. 경제 민주화, 참 어려운 이야기다. 하지만 족벌 경영이 존재하는 한 회사가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오너가 있는 한 민주화란 없다. 재벌이 외국 자본으로부터 회사를 지키는데 유리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인사들도 있다.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진 회사는 이미 국민들의 소유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경제, 그리고 투명한 기업 활동에 대한 작가의 꿈에 한 표 더해 본다. 

  

소설을 다시 훑으면서 왜 정치인들을 활용하는 이야기는 안 했을까? 검찰을 이용하려면 정치를 언급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마도 민감해서가 아니라 정치를 곁들이면 독자들이 머리가 아플까 봐 둥글뭉수레하게 넘어간 것 같다.

 

소설을 덮고도 계속 입에 되뇌게 되는 말이 있다. '아내의 둔감이 다행스러우면서도, 괘씸했다.' '아내의 둔감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외로웠다.' 가장의 책임감을 나눌 때가 없는 우리 시대의 남편들이 가끔 아내들에게 갖는 감정을 너무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변절한 486들, 이제는 586도 상당수가 되었지만 컴퓨터는 숫자가 올라가면 성능이 좋아지지만 이 세대는 숫자가 올라갈 수록 더 부끄러워질 것만 같다.